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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새 문서: {{진행중}} {{문화유산정보 |사진=애일당.jpg |사진출처=[http://www.heritage.go.kr/heri/cul/culSelectDetail.do?ccbaCpno=2113700340000 애일당], 국가문화유산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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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 건물은 조선시대의 학자이자 문신 농암 이현보(聾巖 李賢輔, 1467-1555)가 지은 별당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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안동에서 태어난 이현보는 연산군 4년(1498) 과거에 급제한 후 여러 벼슬을 지냈다. 노년에는 고향으로 돌아와 퇴계 이황 등과 교유하며 자연을 노래하는 시조 등의 문학 작품을 많이 남겼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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애일당은 중종 7년(1512)에 처음 세워졌다. 이현보는 노쇠한 부모를 기쁘게 하기 위해 귀먹바위[耳塞巖]라고 불리던 바위 옆 분강(汾江)이 내려다보이는 자리에 이 건물을 짓고, 90세가 넘은 아버지 이흠(李欽) 등을 중심으로 한 구노회(九老會)를 만들어 이곳에서 잔치를 열었다. 건물의 이름인 ‘애일(愛日)’은 ‘부모를 섬길 날이 가는 것을 아쉬워하며 하루하루를 아낀다’는 뜻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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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548년 농암의 아들 이문량(李文樑, 1498-1581)이 개축한 이후 조선 후기에도 중수되었다고 하며, 일제강점기에 예안에서 도산까지 도로를 개설하게 되면서 영지산 위쪽으로 옮겨 지었다. 안동댐 건설로 인해 1975년에 안동시 도산면 분천리로 다시 옮겨졌고, 2005년 농암 유적지를 정비하면서 지금의 위치에 자리를 잡게 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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건물 앞쪽은 전체에 대청마루를 깔았고, 뒤쪽은 가운데에 마루를 두고 좌우에 온돌방을 꾸민 구조이다. 대청 앞으로는 난간을 두른 좁은 툇마루를 덧달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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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애일당' 편액의 글씨와 관련해 전해지는 이야기가 있다. 이현보는 중국 명필의 글씨를 받기 위해 제자를 중국으로 보냈다. 제자는 칡 줄기로 써준 명필의 글씨를 알아보지 못하고 다시 써 줄 것을 부탁했는데, 그 사람이 종이를 흔들자 글자가 학으로 변해 날아갔고, 다시 써주지 않았다. 제자는 하는 수 없이 명필의 제자에게 글씨를 받아왔고, 자신이 세상을 뜨기 직전 이 사실을 고백했다고 한다. 편액 원본은 현재 한국국학진흥원에 보관되어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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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현재 애일당 축대 아래에 있는 ‘농암선생정대구장(聾巖先生亭臺舊庄)’이라는 각자(刻字)는 일제강점기에 애일당을 이건하면서 처음 섰던 자리를 기념하기 위하여 농암 주변의 자연 암벽에 2자씩 새긴 것인데, 이 역시 수몰로 인해 글자 부분만 절단하여 현재 위치로 이건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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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농암은 1519년 안동부사로 재직하면서 성별과 신분을 불문하고 80세 이상 노인을 모시고 화산양로연(花山養老燕)을 개최했다. / 1533년 홍문관 대제학이라는 정2품의 높은 벼슬에도 불구하고 애일당에서 아버지를 비롯한 마을 노인 여덟 분을 모시고 때때옷을 입고 춤을 추었다. 이날 모임을 아홉 분의 노인이 애일당에 모였다는 뜻에서 ‘애일당 구로회’라고 이름 지었다. 당시 농암의 부친 이흠(李欽)은 94세, 나머지 여덟 명을 포함한 전체 연령은 740세. 1569년 구로회에는 퇴계 이황도 69세 나이로 참여했다. 이 모임은 1979년 후 중단됐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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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참고자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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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애일당, 디지털안동문화대전 http://andong.grandculture.net/andong/toc/GC02400903 → 애일당(愛日堂)은 조선 중종 때 문신이며 학자인 농암(聾巖) 이현보(李賢輔, 1467~1555)의 별당이다. 애일당은 이현보가 어버이에게 효도하고, 산수와 전원을 벗 삼아 강호가도(江湖歌道)의 시가를 읊조리던 유서 깊은 장소로서 ‘효자는 날이 가는 것을 아까워 한다’는 뜻에서 취한 당호이다. / 애일당은 1512년(중종 7) 처음 세워졌고, 1548년(명종 3)에 고쳐 지었다. 현재의 건물은 조선 후기에 다시 지은 것이다. 이현보는 46세 때이던 1512년(중종 7) 94세의 부친과 92세의 숙부, 82세의 사정(司正) 김집(金緝) 등을 중심으로 한 구로회(九老會)를 만들고 늙은 아버지를 기쁘게 해드리기 위하여 애일당을 처음 지었다고 전한다. 이현보의 집에서 동쪽으로 약 400m쯤 떨어진 분강(汾江) 기슭에는 예로부터 귀먹바위[耳塞巖]라고 불리는 바위가 있었는데, 이현보가 이를 인취(引取)하여 자호(自號)로 삼고 이 바위 옆 자연 암석 위에 애일당을 지었다고 한다. 그러나 일제강점기 도로 개설로 인하여 애일당을 영지산 위쪽으로 이건하였으며, 1975년 안동댐 건설로 안동시 도산면 분천리 산11-17번지로 다시 이건하였다. 현재 애일당 축대 아래에 있는 ‘농암선생정대구장(聾巖先生亭臺舊庄)’이라는 각자(刻字)는 일제강점기에 애일당을 이건하면서 처음 섰던 자리를 기념하기 위하여 농암 주변의 자연 암벽에 2자씩 새긴 것인데, 이 역시 수몰로 인해 글자 부분만 절단하여 현재 위치로 이건하였다./ 애일당은 정면 4칸, 측면 2칸의 건물로 안에는 이언적(李彦迪)·이황(李滉)·이현보 등의 시문 편액이 걸려 있다. 뒤쪽 열 양옆에 각각 1칸의 온돌방을 두었고, 가운데 2칸과 앞 열 4칸은 모두 대청이다. 그러나 전면 4칸은 칸살이 좁은 툇간이며 툇마루 끝에는 계자각(鷄子脚) 난간을 부설하였다. 원기둥을 사용하고 그 위에 2중보를 걸어 만든 5량가인데 종보는 홍예보이고 그 위에 화문(花文)을 새긴 포대공(包臺工)을 세웠다. 퇴보 역시 완만한 홍예보이다. 지붕은 옆면이 ‘여덟 팔(八)’자 모양인 팔작지붕집이며 부연을 단 겹처마로 되어 있다. 현재 애일당은 농암유적지정비사업으로 인하여 도산면 가송리 현 위치로 옮겨진 상태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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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안동 농암종택 ‘애일당 구로회’ 재연 , 영남일보, 2012.10.18. https://www.yeongnam.com/web/view.php?key=20121018.010080715570001 → 우리나라 강호문학의 창시자인 농암은 1512년 부모를 위해 종택 인근 강 기슭에 정자를 짓고 애일당이라 이름 붙였다. 애일은 ‘하루하루의 날을 아낀다’는 뜻으로, 애일당이란 부모가 살아 계신 나날을 아끼는 집을 의미한다. 농암은 특별한 날이나 명절이면 부모와 마을 노인들을 즐겁게 해드리기 위해 아우들과 함께 때때옷을 입고 춤을 추었다고 전해진다. 농암은 1519년 안동부사로 재직하면서 성별과 신분을 불문하고 80세 이상 노인을 모시고 화산양로연(花山養老燕)을 개최했다. 기록에 따르면 청사마당과 마루에는 수백명에 달하는 노인이 모였는데, 농암은 “안동의 옛 풍속이 나이는 숭상하나 관직은 숭상하지 않는다”며 남녀귀천을 가리지 않고 연령을 기준으로 초대했다. 고을 원의 신분으로 때때옷을 입고 춤을 추어 당시 엄격한 신분사회에서는 파격적인 행사였다. 또 1533년 홍문관 대제학이라는 정2품의 높은 벼슬에도 불구하고 애일당에서 아버지를 비롯한 마을 노인 여덟 분을 모시고 때때옷을 입고 춤을 추었다. 이날 모임을 아홉 분의 노인이 애일당에 모였다는 뜻에서 ‘애일당 구로회’라고 이름 지었다. 당시 농암의 부친 이흠(李欽)은 94세, 나머지 여덟 명을 포함한 전체 연령은 740세. 1569년 구로회에는 퇴계 이황도 69세 나이로 참여했다. 이 모임은 1979년 후 중단됐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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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야기가 있는 옛 懸板을 찾아서 .31] 안동 농암종택 ‘애일당’, 영남일보, 2014.1.8 https://www.yeongnam.com/web/view.php?key=20140108.010200813360001 → 애일당은 농암이 1512년 연로한 부모에게 효도하기 위해 특별히 지은 건물이다. ‘애일’은 늙은 부모를 모실 수 있는 시간이 부족하므로 하루하루를 아끼며 효도를 하겠다는 의미를 지니고 있다. 노부모의 늙어감을 아쉬워하여 하루하루를 아낀다는 뜻에서 애일당(愛日堂)이라 한 것이다. 애일당을 짓게 된 경위에 대해서는 농암의 ‘애일당중신기(愛日堂重新記)’(1548)에 잘 나와있다. 애일당은 농암의 나이 46세 때 안동 도산면 분강(汾江) 기슭 농암(聾巖) 위에다 처음 지었으나, 세월이 흘러 당이 무너지자 1548년 농암의 아들이 개축했다. 현재의 건물은 조선 후기에 다시 지은 것이다. 이 애일당은 안동댐 건설로 안동시 도산면 분천리에 이건되었다가, 현재는 안동시 도산면 가송리(올미재) 농암종택으로 자리로 옮겼다. /‘애일당’ 편액 글씨와 관련해 일화가 전한다. 농암은 제자를 중국에 보내 중국 명필의 글씨를 받아오게 했다. 제자는 수개월 만에 중국에 도착했고, 다시 그 명필을 찾아 한 달을 헤맸다. 드디어 깊은 산중에 있는 명필을 수소문해 찾아 ‘애일당’ 글씨를 청했다. 그 사람은 보잘것없는 사람의 글씨를 받으려고 그 먼 곳에서 여기까지 왔느냐면서, 산에서 꺾어온 칡 줄기를 아무렇게나 쥐고 듬뿍 먹을 찍더니 단숨에 ‘애일당’ 석자를 써서 내주었다. 하지만 농암 제자는 명필의 글씨를 알아보지 못했다. 좋은 붓으로 정성스레 글씨를 써줄 것을 기대했던 제자는 내심 마음에 차지 않았다. 그래서 다시 써줄 수 없느냐고 조심스레 물었다. 중국 명필은 “이 글씨가 마음에 안 드시오” 하더니 종이를 가볍게 두세 번 흔들었다. 그러자 세 글자가 꿈틀거리더니 세 마리의 하얀 학이 되어 날아가 버렸다. 그제서야 제자는 자신이 잘못한 줄 알고 다시 써 줄 것을 빌었다. 그러나 끝내 써주지 않고, 아래로 내려가면 자신보다 더 잘 쓰는 사람이 있으니 그 사람을 찾아가 보라고 했다. 제자는 할 수 없이 그가 말한 대로 산 아래에 있는 명필을 찾아갔다. 찾아가서 자초지종을 이야기하니 “그분은 저의 스승으로 남에게 글씨를 주지 않는 분인데, 특별히 조선에서 왔다하여 써준 것 같다”며 아쉬워했다. 그리고 자신의 글씨는 스승의 반도 따라가지 못하지만, 학 한 마리 정도는 날려 보낼 수 있다고 말하면서 글씨를 써 주었다. 우여곡절 끝에 글씨를 받아 돌아온 제자는 농암을 볼 낯이 없어, 아무에게도 이야기를 안 해주다가 그가 세상을 뜨면서 고백해 알려졌다고 한다. 힘있는 해서체인 ‘애일당’ 편액 원본은 현재 한국국학진흥원에 보관돼 있다. (<참고> 학의 신기가 담긴 애일당 현판, 디지털안동문화대전  http://andong.grandculture.net/andong/toc/GC02402443 )
  
  

2021년 4월 18일 (일) 17:31 판


애일당
애일당, 국가문화유산포털, 문화재청.
대표명칭 애일당
한자 愛日堂
주소 경북 안동시 도산면 분천리 산11-17번지
지정번호 경상북도 유형문화재 제34호
지정일 1973년 8월 31일
분류 유적건조물/주거생활/주거건축/가옥
수량/면적 1동
웹사이트 애일당, 국가문화유산포털, 문화재청.



해설문

기존 국문

이 건물은 농암(聾巖) 이현보(李賢輔, 1467~1555)의 별당 건물이다. 조선 중종(中宗) 7년(1512)에 부친과 숙부 등을 중심으로 구노회(九老會)를 만들고 경로당을 지어 늙은 부모를 기쁘게 하기 위해 지었다고 한다. 당호(堂號)는 부친이 늙어감을 아쉬워하여 하루하루를 아낀다는 뜻에서 애일당(愛日堂)이라 하였다.

1975년 옮기기 전에 애일당은 분강(汾江)과 의촌이 내려다보이는 농암이라 불리는 절벽 위에 세워져 있었고 그 아래에 ‘농암선생정대구장(聾巖先生亭臺舊庄)’이란 글씨가 새겨져 있었다. 북서쪽은 산이고 앞면은 절벽이어서 남쪽에 문을 내었다.

이 건물은 정면 4칸, 측면 2칸의 팔작지붕으로 뒤쪽 양 옆에 1칸씩 온돌방을 두고 앞쪽 4칸은 모두 대청으로 꾸몄다. 1975년 안동댐 건설로 도산면 분천리로 옮겼다가 2005년 이 곳으로 다시 이건하였다.


수정 국문

초고

이 건물은 조선시대의 학자이자 문신 농암 이현보(聾巖 李賢輔, 1467-1555)가 지은 별당이다.

안동에서 태어난 이현보는 연산군 4년(1498) 과거에 급제한 후 여러 벼슬을 지냈다. 노년에는 고향으로 돌아와 퇴계 이황 등과 교유하며 자연을 노래하는 시조 등의 문학 작품을 많이 남겼다.

애일당은 중종 7년(1512)에 처음 세워졌다. 이현보는 노쇠한 부모를 기쁘게 하기 위해 귀먹바위[耳塞巖]라고 불리던 바위 옆 분강(汾江)이 내려다보이는 자리에 이 건물을 짓고, 90세가 넘은 아버지 이흠(李欽) 등을 중심으로 한 구노회(九老會)를 만들어 이곳에서 잔치를 열었다. 건물의 이름인 ‘애일(愛日)’은 ‘부모를 섬길 날이 가는 것을 아쉬워하며 하루하루를 아낀다’는 뜻이다.

1548년 농암의 아들 이문량(李文樑, 1498-1581)이 개축한 이후 조선 후기에도 중수되었다고 하며, 일제강점기에 예안에서 도산까지 도로를 개설하게 되면서 영지산 위쪽으로 옮겨 지었다. 안동댐 건설로 인해 1975년에 안동시 도산면 분천리로 다시 옮겨졌고, 2005년 농암 유적지를 정비하면서 지금의 위치에 자리를 잡게 되었다.

건물 앞쪽은 전체에 대청마루를 깔았고, 뒤쪽은 가운데에 마루를 두고 좌우에 온돌방을 꾸민 구조이다. 대청 앞으로는 난간을 두른 좁은 툇마루를 덧달았다.

  • '애일당' 편액의 글씨와 관련해 전해지는 이야기가 있다. 이현보는 중국 명필의 글씨를 받기 위해 제자를 중국으로 보냈다. 제자는 칡 줄기로 써준 명필의 글씨를 알아보지 못하고 다시 써 줄 것을 부탁했는데, 그 사람이 종이를 흔들자 글자가 학으로 변해 날아갔고, 다시 써주지 않았다. 제자는 하는 수 없이 명필의 제자에게 글씨를 받아왔고, 자신이 세상을 뜨기 직전 이 사실을 고백했다고 한다. 편액 원본은 현재 한국국학진흥원에 보관되어 있다.
  • 현재 애일당 축대 아래에 있는 ‘농암선생정대구장(聾巖先生亭臺舊庄)’이라는 각자(刻字)는 일제강점기에 애일당을 이건하면서 처음 섰던 자리를 기념하기 위하여 농암 주변의 자연 암벽에 2자씩 새긴 것인데, 이 역시 수몰로 인해 글자 부분만 절단하여 현재 위치로 이건하였다.
  • 농암은 1519년 안동부사로 재직하면서 성별과 신분을 불문하고 80세 이상 노인을 모시고 화산양로연(花山養老燕)을 개최했다. / 1533년 홍문관 대제학이라는 정2품의 높은 벼슬에도 불구하고 애일당에서 아버지를 비롯한 마을 노인 여덟 분을 모시고 때때옷을 입고 춤을 추었다. 이날 모임을 아홉 분의 노인이 애일당에 모였다는 뜻에서 ‘애일당 구로회’라고 이름 지었다. 당시 농암의 부친 이흠(李欽)은 94세, 나머지 여덟 명을 포함한 전체 연령은 740세. 1569년 구로회에는 퇴계 이황도 69세 나이로 참여했다. 이 모임은 1979년 후 중단됐다.

1차 수정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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문맥요소

Nodes

ID Class Label Description
이현보 Actor 이현보(李賢輔,_ 1467-1555)
이흠 Actor 이흠(李欽)
애일당 Place 애일당
분강 Place 분강
구노회 Concept 구노회(九老會)
영지산 Place 영지산
이문량 Actor 이문량(李文樑,_1498-1581)
농암_유적지_정비 Event 농암_유적지_정비
안동댐_건설 Event 안동댐_건설
애일당_현판 Object 애일당_현판
한국국학진흥원 Place 한국국학진흥원
농암_종택 Place 농암_종택

Links

애일당_현판||한국국학진흥원||currentLocation
Source Target Relation
애일당 이현보 constructor / founder
애일당 이문량 reconstructor / renovator
이현보 이문량 hasSon
이흠 이현보 hasSon
구노회 애일당 isRelatedTo
애일당 안동댐_건설 isRelatedTo
애일당 농암_유적지_정비 isRelatedTo
애일당 분강 formerLocation
애일당 애일당_현판 hasPart
애일당 영지산 formerLocation
농암_종택 애일당 isNear

참고자료

  • 애일당, 디지털안동문화대전 http://andong.grandculture.net/andong/toc/GC02400903 → 애일당(愛日堂)은 조선 중종 때 문신이며 학자인 농암(聾巖) 이현보(李賢輔, 1467~1555)의 별당이다. 애일당은 이현보가 어버이에게 효도하고, 산수와 전원을 벗 삼아 강호가도(江湖歌道)의 시가를 읊조리던 유서 깊은 장소로서 ‘효자는 날이 가는 것을 아까워 한다’는 뜻에서 취한 당호이다. / 애일당은 1512년(중종 7) 처음 세워졌고, 1548년(명종 3)에 고쳐 지었다. 현재의 건물은 조선 후기에 다시 지은 것이다. 이현보는 46세 때이던 1512년(중종 7) 94세의 부친과 92세의 숙부, 82세의 사정(司正) 김집(金緝) 등을 중심으로 한 구로회(九老會)를 만들고 늙은 아버지를 기쁘게 해드리기 위하여 애일당을 처음 지었다고 전한다. 이현보의 집에서 동쪽으로 약 400m쯤 떨어진 분강(汾江) 기슭에는 예로부터 귀먹바위[耳塞巖]라고 불리는 바위가 있었는데, 이현보가 이를 인취(引取)하여 자호(自號)로 삼고 이 바위 옆 자연 암석 위에 애일당을 지었다고 한다. 그러나 일제강점기 도로 개설로 인하여 애일당을 영지산 위쪽으로 이건하였으며, 1975년 안동댐 건설로 안동시 도산면 분천리 산11-17번지로 다시 이건하였다. 현재 애일당 축대 아래에 있는 ‘농암선생정대구장(聾巖先生亭臺舊庄)’이라는 각자(刻字)는 일제강점기에 애일당을 이건하면서 처음 섰던 자리를 기념하기 위하여 농암 주변의 자연 암벽에 2자씩 새긴 것인데, 이 역시 수몰로 인해 글자 부분만 절단하여 현재 위치로 이건하였다./ 애일당은 정면 4칸, 측면 2칸의 건물로 안에는 이언적(李彦迪)·이황(李滉)·이현보 등의 시문 편액이 걸려 있다. 뒤쪽 열 양옆에 각각 1칸의 온돌방을 두었고, 가운데 2칸과 앞 열 4칸은 모두 대청이다. 그러나 전면 4칸은 칸살이 좁은 툇간이며 툇마루 끝에는 계자각(鷄子脚) 난간을 부설하였다. 원기둥을 사용하고 그 위에 2중보를 걸어 만든 5량가인데 종보는 홍예보이고 그 위에 화문(花文)을 새긴 포대공(包臺工)을 세웠다. 퇴보 역시 완만한 홍예보이다. 지붕은 옆면이 ‘여덟 팔(八)’자 모양인 팔작지붕집이며 부연을 단 겹처마로 되어 있다. 현재 애일당은 농암유적지정비사업으로 인하여 도산면 가송리 현 위치로 옮겨진 상태이다.
  • 안동 농암종택 ‘애일당 구로회’ 재연 , 영남일보, 2012.10.18. https://www.yeongnam.com/web/view.php?key=20121018.010080715570001 → 우리나라 강호문학의 창시자인 농암은 1512년 부모를 위해 종택 인근 강 기슭에 정자를 짓고 애일당이라 이름 붙였다. 애일은 ‘하루하루의 날을 아낀다’는 뜻으로, 애일당이란 부모가 살아 계신 나날을 아끼는 집을 의미한다. 농암은 특별한 날이나 명절이면 부모와 마을 노인들을 즐겁게 해드리기 위해 아우들과 함께 때때옷을 입고 춤을 추었다고 전해진다. 농암은 1519년 안동부사로 재직하면서 성별과 신분을 불문하고 80세 이상 노인을 모시고 화산양로연(花山養老燕)을 개최했다. 기록에 따르면 청사마당과 마루에는 수백명에 달하는 노인이 모였는데, 농암은 “안동의 옛 풍속이 나이는 숭상하나 관직은 숭상하지 않는다”며 남녀귀천을 가리지 않고 연령을 기준으로 초대했다. 고을 원의 신분으로 때때옷을 입고 춤을 추어 당시 엄격한 신분사회에서는 파격적인 행사였다. 또 1533년 홍문관 대제학이라는 정2품의 높은 벼슬에도 불구하고 애일당에서 아버지를 비롯한 마을 노인 여덟 분을 모시고 때때옷을 입고 춤을 추었다. 이날 모임을 아홉 분의 노인이 애일당에 모였다는 뜻에서 ‘애일당 구로회’라고 이름 지었다. 당시 농암의 부친 이흠(李欽)은 94세, 나머지 여덟 명을 포함한 전체 연령은 740세. 1569년 구로회에는 퇴계 이황도 69세 나이로 참여했다. 이 모임은 1979년 후 중단됐다.
  • [이야기가 있는 옛 懸板을 찾아서 .31] 안동 농암종택 ‘애일당’, 영남일보, 2014.1.8 https://www.yeongnam.com/web/view.php?key=20140108.010200813360001 → 애일당은 농암이 1512년 연로한 부모에게 효도하기 위해 특별히 지은 건물이다. ‘애일’은 늙은 부모를 모실 수 있는 시간이 부족하므로 하루하루를 아끼며 효도를 하겠다는 의미를 지니고 있다. 노부모의 늙어감을 아쉬워하여 하루하루를 아낀다는 뜻에서 애일당(愛日堂)이라 한 것이다. 애일당을 짓게 된 경위에 대해서는 농암의 ‘애일당중신기(愛日堂重新記)’(1548)에 잘 나와있다. 애일당은 농암의 나이 46세 때 안동 도산면 분강(汾江) 기슭 농암(聾巖) 위에다 처음 지었으나, 세월이 흘러 당이 무너지자 1548년 농암의 아들이 개축했다. 현재의 건물은 조선 후기에 다시 지은 것이다. 이 애일당은 안동댐 건설로 안동시 도산면 분천리에 이건되었다가, 현재는 안동시 도산면 가송리(올미재) 농암종택으로 자리로 옮겼다. /‘애일당’ 편액 글씨와 관련해 일화가 전한다. 농암은 제자를 중국에 보내 중국 명필의 글씨를 받아오게 했다. 제자는 수개월 만에 중국에 도착했고, 다시 그 명필을 찾아 한 달을 헤맸다. 드디어 깊은 산중에 있는 명필을 수소문해 찾아 ‘애일당’ 글씨를 청했다. 그 사람은 보잘것없는 사람의 글씨를 받으려고 그 먼 곳에서 여기까지 왔느냐면서, 산에서 꺾어온 칡 줄기를 아무렇게나 쥐고 듬뿍 먹을 찍더니 단숨에 ‘애일당’ 석자를 써서 내주었다. 하지만 농암 제자는 명필의 글씨를 알아보지 못했다. 좋은 붓으로 정성스레 글씨를 써줄 것을 기대했던 제자는 내심 마음에 차지 않았다. 그래서 다시 써줄 수 없느냐고 조심스레 물었다. 중국 명필은 “이 글씨가 마음에 안 드시오” 하더니 종이를 가볍게 두세 번 흔들었다. 그러자 세 글자가 꿈틀거리더니 세 마리의 하얀 학이 되어 날아가 버렸다. 그제서야 제자는 자신이 잘못한 줄 알고 다시 써 줄 것을 빌었다. 그러나 끝내 써주지 않고, 아래로 내려가면 자신보다 더 잘 쓰는 사람이 있으니 그 사람을 찾아가 보라고 했다. 제자는 할 수 없이 그가 말한 대로 산 아래에 있는 명필을 찾아갔다. 찾아가서 자초지종을 이야기하니 “그분은 저의 스승으로 남에게 글씨를 주지 않는 분인데, 특별히 조선에서 왔다하여 써준 것 같다”며 아쉬워했다. 그리고 자신의 글씨는 스승의 반도 따라가지 못하지만, 학 한 마리 정도는 날려 보낼 수 있다고 말하면서 글씨를 써 주었다. 우여곡절 끝에 글씨를 받아 돌아온 제자는 농암을 볼 낯이 없어, 아무에게도 이야기를 안 해주다가 그가 세상을 뜨면서 고백해 알려졌다고 한다. 힘있는 해서체인 ‘애일당’ 편액 원본은 현재 한국국학진흥원에 보관돼 있다. (<참고> 학의 신기가 담긴 애일당 현판, 디지털안동문화대전 http://andong.grandculture.net/andong/toc/GC02402443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