토론:애일당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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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21년 국문집필

기존 국문

이 건물은 농암(聾巖) 이현보(李賢輔, 1467~1555)의 별당 건물이다. 조선 중종(中宗) 7년(1512)에 부친과 숙부 등을 중심으로 구노회(九老會)를 만들고 경로당을 지어 늙은 부모를 기쁘게 하기 위해 지었다고 한다. 당호(堂號)는 부친이 늙어감을 아쉬워하여 하루하루를 아낀다는 뜻에서 애일당(愛日堂)이라 하였다.

1975년 옮기기 전에 애일당은 분강(汾江)과 의촌이 내려다보이는 농암이라 불리는 절벽 위에 세워져 있었고 그 아래에 ‘농암선생정대구장(聾巖先生亭臺舊庄)’이란 글씨가 새겨져 있었다. 북서쪽은 산이고 앞면은 절벽이어서 남쪽에 문을 내었다.

이 건물은 정면 4칸, 측면 2칸의 팔작지붕으로 뒤쪽 양 옆에 1칸씩 온돌방을 두고 앞쪽 4칸은 모두 대청으로 꾸몄다. 1975년 안동댐 건설로 도산면 분천리로 옮겼다가 2005년 이 곳으로 다시 이건하였다.

수정 국문

초고

이 건물은 조선시대의 학자이자 문신 농암 이현보(聾巖 李賢輔, 1467-1555)가 지은 별당이다.

안동에서 태어난 이현보는 연산군 4년(1498) 과거에 급제한 후 여러 벼슬을 지냈다. 노년에는 고향으로 돌아와 퇴계 이황 등과 교유하며 자연을 노래하는 시조 등의 문학 작품을 많이 남겼다.

애일당은 중종 7년(1512)에 처음 세워졌다. 이현보는 노쇠한 부모를 기쁘게 하기 위해 귀먹바위[耳塞巖]라고 불리던 바위 옆 분강(汾江)이 내려다보이는 자리에 이 건물을 짓고, 90세가 넘은 아버지 이흠(李欽) 등을 중심으로 한 구노회(九老會)를 만들어 이곳에서 잔치를 열었다. 건물의 이름인 ‘애일(愛日)’은 ‘부모를 섬길 날이 가는 것을 아쉬워하며 하루하루를 아낀다’는 뜻이다.

1548년 농암의 아들 이문량(李文樑, 1498-1581)이 개축한 이후 조선 후기에도 중수되었다고 하며, 일제강점기에 예안에서 도산까지 도로를 개설하게 되면서 영지산 위쪽으로 옮겨 지었다. 안동댐 건설로 인해 1975년에 안동시 도산면 분천리로 다시 옮겨졌고, 2005년 농암 유적지를 정비하면서 지금의 위치에 자리를 잡게 되었다.

건물 앞쪽은 전체에 대청마루를 깔았고, 뒤쪽은 가운데에 마루를 두고 좌우에 온돌방을 꾸민 구조이다. 대청 앞으로는 난간을 두른 좁은 툇마루를 덧달았다.

  • '애일당' 편액의 글씨와 관련해 전해지는 이야기가 있다. 이현보는 중국 명필의 글씨를 받기 위해 제자를 중국으로 보냈다. 제자는 칡 줄기로 써준 명필의 글씨를 알아보지 못하고 다시 써 줄 것을 부탁했는데, 그 사람이 종이를 흔들자 글자가 학으로 변해 날아갔고, 다시 써주지 않았다. 제자는 하는 수 없이 명필의 제자에게 글씨를 받아왔고, 자신이 세상을 뜨기 직전 이 사실을 고백했다고 한다. 편액 원본은 현재 한국국학진흥원에 보관되어 있다.
  • 현재 애일당 축대 아래에 있는 ‘농암선생정대구장(聾巖先生亭臺舊庄)’이라는 각자(刻字)는 일제강점기에 애일당을 이건하면서 처음 섰던 자리를 기념하기 위하여 농암 주변의 자연 암벽에 2자씩 새긴 것인데, 이 역시 수몰로 인해 글자 부분만 절단하여 현재 위치로 이건하였다.
  • 농암은 1519년 안동부사로 재직하면서 성별과 신분을 불문하고 80세 이상 노인을 모시고 화산양로연(花山養老燕)을 개최했다. / 1533년 홍문관 대제학이라는 정2품의 높은 벼슬에도 불구하고 애일당에서 아버지를 비롯한 마을 노인 여덟 분을 모시고 때때옷을 입고 춤을 추었다. 이날 모임을 아홉 분의 노인이 애일당에 모였다는 뜻에서 ‘애일당 구로회’라고 이름 지었다. 당시 농암의 부친 이흠(李欽)은 94세, 나머지 여덟 명을 포함한 전체 연령은 740세. 1569년 구로회에는 퇴계 이황도 69세 나이로 참여했다. 이 모임은 1979년 후 중단됐다.

1차 수정

애일당은 조선시대의 학자이자 문신 농암 이현보(聾巖 李賢輔, 1467~1555)가 늙은 아버지를 기쁘게 해드리기 위해 지은 별당이다.

이현보의 집에서 동쪽으로 약 400m 떨어진 분강 기슭에는 귀먹바위라고 불리는 바위가 있었는데, 이현보가 중종 7년(1512) 이 바위 옆에 애일당을 처음 지었다고 한다. 그리고 94세의 아버지 이흠(李欽)을 비롯한 마을 노인 9명을 모시고 구로회(九老會)를 만들어 애일당에서 잔치를 열었다. 건물의 이름인 ‘애일(愛日)’은 ‘부모를 섬길 날이 가는 것을 아쉬워하며 하루하루를 아낀다’는 뜻이다.

1548년 이현보의 아들 이문량(李文樑, 1498~1581)이 개축한 이후 조선 후기에도 중수되었다고 하며, 일제강점기에 예안에서 도산까지 도로를 개설하게 되면서 영지산 위쪽으로 옮겨 지었다. 안동댐 건설로 인해 1975년에 도산면 분천리로 다시 옮겨졌고, 2005년 농암유적지를 정비하면서 지금의 위치에 자리를 잡게 되었다.

건물 앞쪽은 전체에 대청을 깔았고, 뒤쪽은 가운데에 마루를 두고 양옆에 온돌방을 두었다. 대청 앞으로는 난간을 두른 좁은 툇마루를 덧달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