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함양 학사루"의 두 판 사이의 차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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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주소=경상남도 함양군 함양읍 학사루길 4 (운림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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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해설문'''==
 
=='''해설문'''==
===기존 국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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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국문===
이 누각의 창건 연대는 알 수 없으나, 고운(孤雲) 최치원(崔致遠, 857~?)선생이 함양 태수로 있을 때 이곳에 올라 시를 자주 지었기 때문에 학사루(學士樓)라는 이름이 붙었다고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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학사루는 원래 관가의 객사(客舍)인 위성관의 문루(궁문이나 성문의 바깥문 위에 지은 다락집)였다. 천연 기념물 제407호인 학사루 느티나무 옆에 있었으나 1979년 지금의 위치로 옮겼다.  
  
조선시대 관청의 객사(客舍) 자리인 현 함양초등학교 한에 있었던 것을 1979년에 현재 위치로 옮겼다. 이전 당시에 발견된 기록에 따르면, 임진왜란 때 불탄 것을 1692년(숙종 18)에 중수하였다고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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중종 25년(1530) 편찬된 <신증동국여지승람>에는‘학사루는 객관 서편에 있다. 최치원이 태수로 있으면서 오르던 곳인 까닭에 학사루라 이름 하였다. 그 뒤에 왜적에 의해 소실되었는데 고을 관아를 옮길 때 누 또한 옮겨다 지었으나 이름은 그대로였다’는 기록이 남아 있으나 정확한 창건 연대는 알 수 없다. 1910년 함양보통학교가 개교한 후 일제 강점기 때는 교실로, 그 뒤에는 군립도서관 등으로 이용되기도 하였다.
  
원래 학사루는 객사의 부속 건물로 함양 읍성의 중심에 위치하였다. 그러나 일제 강점기에 학사루를 제외하고 객사를 비롯한 다른 중요한 건물들이 모두 사라져 버렸다. 이 누각은 정면 5칸, 측면 2칸의 비교적 큰 2층 팔작지붕 건물이다. 그렇게 화려한 건물은 아니지만, 누의 아래와 위, 지붕의 비례가 대단히 조화롭고 안정되어 있으므로, 조선시대 관청에서 지은 누각 건축의 전형을 보여주고 있다. 이 건물과 관련된 일화가 하나 있다. 김종직(金宗直, 1431~1492)이 함양 군수로 있을 때 이곳에 걸려 있던 유자광(柳子光, ?~1512)이 쓴 시를 철거한 일이 있었는데, 이것이 사적인 원한으로 발전하여 1498년(연산군 4)일어난 무오사화(戊午士禍)의 한 원인을 제공하였다고 한다.
+
점필재 김종직이 함양 군수로 있을 때 이곳에 걸려 있던 유자광의 시판(詩板)철거한 일이 있었는데, 이것이 사적인 원한으로 발전하여 연산군 4년(1498) 일어난 무오사화(戊午士禍)의 원인이 되기도 하였다.  
  
===수정 국문===
+
조선 시대 누각 건축 양식의 전형을 보여주는 건물로 평가받고 있다.  
====초고====
 
이 누각은 신라 말기 학자이자 문장가였던 최치원(崔致遠, 857~?)이 함양 태수(당시에는 천령 태수)로 있을 때 자주 올라 시를 지었기 때문에 학사루(學士樓)라고 불리었다. 창건 연대는 정확히 알 수 없으나 신라 말기로 추정된다.
 
  
전해지는 이야기로 조선 중기 김종직(金宗直, 1431~1492)이 이곳 군수로 있을 때 학사루에 걸린 유자광(柳子光, 1439~1512)의 시를 내리도록 한 것이 원인이 되어 1498년 무오사화가 일어났다고 한다.
+
===영문===
 +
'''Haksaru Pavilion, Hamyang'''
  
원래는 관아에 딸린 건물로 옆에 객사(客舍)가 있었고, 동쪽에는 제운루(齊雲樓), 서쪽에는 청상루(淸商樓), 남쪽에는 망악루(望嶽樓)가 있었다고 전한다. 지방 관리가 피로한 마음을 풀기 위하여 이곳에 올라 시를 짓고 글을 쓰며 몸과 마음을 달랬던 곳으로 알려져 있다. 임진왜란 때 불탔던 것을 1692년에 중수하였으며 1978년에 지금의 위치로 옮겨지었고 2015년에 단청을 새롭게 정비하였다.
+
This was the gate pavilion of the guesthouse of the local government office.
  
====1차 수정====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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It is uncertain when this pavilion was first established. It is said that Choe Chi-won (857-?), a famous scholar and writer of the Unified Silla period (668-935), used to visit this place when he served as magistrate of Hamyang, as did many other government officials, who came here in later years to write poetry and rest from work at the office. The pavilion burnt down during the Japanese invasions of 1592-1598 and was reconstructed in 1692. In the 20th century, it was used for some time as a classroom and a public library.
학사루는 통일신라 말기의 학자이자 문장가였던 최치원(崔致遠, 857~?)이 함양 태수로 있을 때 자주 찾았다고 전해지는 누각이다. 최초 창건 연대는 정확히 알 수 없다.  
 
  
원래는 관아에 딸린 건물이었으며, 지방 관리가 이곳에 올라 시를 짓고 글을 쓰며 피로한 몸과 마음을 달랬다고 한다. 임진왜란 때 불탔던 것을 1692년에 중수하였으며 1978년에 지금의 위치로 옮겨지었고 2015년에 단청을 새롭게 정비하였다.
+
According to a story, when Kim Jong-jik (1431-1492), a renowned scholar of the Joseon period (1392-1910), was serving as local magistrate, he ordered that a plaque previously hung inside the pavilion be taken down, as it contained a poem written by his political rival Yu Ja-gwang (1439-1512). This incident ignited even more hatred between the two men which in turn became one of the causes that led to a literati purge in 1498.
  
전해지는 이야기에 따르면 조선 중기 김종직(金宗直, 1431~1492)이 이곳 군수로 있을 때 학사루에 걸린 유자광(柳子光, 1439~1512)의 시를 내리도록 한 일이 있었는데, 이것이 사적인 원한이 되어 1498년 무오사화가 일어났다고 한다.
+
The pavilion was originally located across the road next to the Saw-leaf Zelkova tree (Natural Monument No. 407) in Hamyang Elementary School, but in 1979, it was moved to the current location. It is regarded as one of the three great pavilions of Hamyang, together with Gwangpungnu Pavilion (Gyeongsangnam-do Tangible Cultural Heritage No. 92) and Hamhwaru Pavilion (Gyeongsangnam-do Tangible Cultural Heritage No. 258).
  
====자문의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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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영문 해설 내용===
#분야별 자문위원 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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학사루는 관아에 딸린 객사의 문루였다.  
#*팔작지붕에 겹처마가 있으며, 원형 누하주 상부는 기둥 사이에 장귀틀로 연결하고 동귀틀에 널판을 끼운 우물마루로 되어 있으며 계자난간으로 둘려져 있다. --> 건축관련 기술 추가함.
 
#분야별 자문위원 2
 
#*원래는 -> 이 누각은  으로 수정
 
#*사적인 원한이  -> 개인적으로 원한이
 
#읽기쉬운문안 자문위원
 
#*지방 관리가 이곳에 올라 시를 짓고 글을 쓰며 업무로 지친 몸과 마음을 달랬다고 한다.
 
#*임진왜란 때 불탔던 것을 1692년에 중수하였다. 1978년에 지금의 위치로 옮겨지었고
 
  
====2차 수정====
+
최초 창건 연대는 정확히 알 수 없다. 통일신라시대의 학자이자 문장가였던 최치원(857~?)이 함양 태수로 있을 때 자주 찾았다고 전해지며, 이후에도 관아의 관리들이 이곳에 올라 시를 짓고 글을 쓰며 업무로 지친 몸과 마음을 달랬다고 한다. 임진왜란 때 불탔던 것을 1692년에 다시 지었고, 20세기에 들어서서는 학교의 교실과 군립도서관 등으로 이용되기도 하였다.
학사루는 통일신라 말기의 학자이자 문장가였던 최치원(崔致遠, 857~?)이 함양 태수로 있을 때 자주 찾았다고 전해지는 누각이다. 최초 창건 연대는 정확히 알 수 없다.
 
 
 
이 누각은 원래 관아에 딸린 건물이었으며, 지방 관리가 이곳에 올라 시를 짓고 글을 쓰며 업무로 지친 몸과 마음을 달랬다고 한다. 임진왜란 때 불탔던 것을 1692년에 중수하였다. 1978년에 지금의 위치로 옮겨지었고, 2015년에 단청을 새롭게 정비하였다.
 
 
 
전해지는 이야기에 따르면 조선 중기 김종직(金宗直, 1431~1492)이 이곳 군수로 있을 때 학사루에 걸린 유자광(柳子光, 1439~1512)의 시를 내리도록 한 일이 있었는데, 이것이 개인적인 원한이 되어 1498년 무오사화가 일어났다고 한다.
 
 
 
=='''문맥요소'''==
 
===Nodes===
 
 
 
===Links===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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전해지는 이야기에 따르면 조선시대의 저명한 학자인 김종직(1431-1492)이 이곳 군수로 있을 때 학사루에 걸린 유자광(1439-1512)의 시가 적힌 현판을 내리도록 한 일이 있었다고 한다. 이것이 개인적인 원한이 되어 1498년 사화의 원인이 되기도 하였다.
  
 +
원래 길 건너 함양초등학교에 있는 학사루 느티나무(천연기념물 제407호) 옆에 있었으나, 1979년 지금의 위치로 옮겼다. 광풍루(경상남도 유형문화재 제92호), 함화루(경상남도 유형문화재 제258호)와 함께 함양의 3대 누각으로 꼽힌다.
  
 
=='''참고자료'''==
 
=='''참고자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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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분류:시도유형문화재]]
 
[[분류:시도유형문화재]]
 
[[분류:누정]]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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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분류:2020 영문집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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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분류: 2020 국문집필]] [[분류: 2020 국문초안지원사업]]

2021년 2월 5일 (금) 16:34 기준 최신판

함양 학사루
Haksaru Pavilion, Hamyang
학사루 전경.jpg
대표명칭 함양 학사루
영문명칭 Haksaru Pavilion, Hamyang
한자 咸陽 學士樓
주소 경상남도 함양군 함양읍 학사루길 4 (운림리)
지정번호 경상남도 유형문화재 제90호
지정일 1974년 2월 16일
분류 유적건조물/주거생활/조경건축/누정
수량/면적 1동
웹사이트 함양 학사루, 국가문화유산포털, 문화재청.



해설문

국문

학사루는 원래 관가의 객사(客舍)인 위성관의 문루(궁문이나 성문의 바깥문 위에 지은 다락집)였다. 천연 기념물 제407호인 학사루 느티나무 옆에 있었으나 1979년 지금의 위치로 옮겼다.

중종 25년(1530) 편찬된 <신증동국여지승람>에는‘학사루는 객관 서편에 있다. 최치원이 태수로 있으면서 오르던 곳인 까닭에 학사루라 이름 하였다. 그 뒤에 왜적에 의해 소실되었는데 고을 관아를 옮길 때 누 또한 옮겨다 지었으나 이름은 그대로였다’는 기록이 남아 있으나 정확한 창건 연대는 알 수 없다. 1910년 함양보통학교가 개교한 후 일제 강점기 때는 교실로, 그 뒤에는 군립도서관 등으로 이용되기도 하였다.

점필재 김종직이 함양 군수로 있을 때 이곳에 걸려 있던 유자광의 시판(詩板)을 철거한 일이 있었는데, 이것이 사적인 원한으로 발전하여 연산군 4년(1498) 일어난 무오사화(戊午士禍)의 원인이 되기도 하였다.

조선 시대 누각 건축 양식의 전형을 보여주는 건물로 평가받고 있다.

영문

Haksaru Pavilion, Hamyang

This was the gate pavilion of the guesthouse of the local government office.

It is uncertain when this pavilion was first established. It is said that Choe Chi-won (857-?), a famous scholar and writer of the Unified Silla period (668-935), used to visit this place when he served as magistrate of Hamyang, as did many other government officials, who came here in later years to write poetry and rest from work at the office. The pavilion burnt down during the Japanese invasions of 1592-1598 and was reconstructed in 1692. In the 20th century, it was used for some time as a classroom and a public library.

According to a story, when Kim Jong-jik (1431-1492), a renowned scholar of the Joseon period (1392-1910), was serving as local magistrate, he ordered that a plaque previously hung inside the pavilion be taken down, as it contained a poem written by his political rival Yu Ja-gwang (1439-1512). This incident ignited even more hatred between the two men which in turn became one of the causes that led to a literati purge in 1498.

The pavilion was originally located across the road next to the Saw-leaf Zelkova tree (Natural Monument No. 407) in Hamyang Elementary School, but in 1979, it was moved to the current location. It is regarded as one of the three great pavilions of Hamyang, together with Gwangpungnu Pavilion (Gyeongsangnam-do Tangible Cultural Heritage No. 92) and Hamhwaru Pavilion (Gyeongsangnam-do Tangible Cultural Heritage No. 258).

영문 해설 내용

학사루는 관아에 딸린 객사의 문루였다.

최초 창건 연대는 정확히 알 수 없다. 통일신라시대의 학자이자 문장가였던 최치원(857~?)이 함양 태수로 있을 때 자주 찾았다고 전해지며, 이후에도 관아의 관리들이 이곳에 올라 시를 짓고 글을 쓰며 업무로 지친 몸과 마음을 달랬다고 한다. 임진왜란 때 불탔던 것을 1692년에 다시 지었고, 20세기에 들어서서는 학교의 교실과 군립도서관 등으로 이용되기도 하였다.

전해지는 이야기에 따르면 조선시대의 저명한 학자인 김종직(1431-1492)이 이곳 군수로 있을 때 학사루에 걸린 유자광(1439-1512)의 시가 적힌 현판을 내리도록 한 일이 있었다고 한다. 이것이 개인적인 원한이 되어 1498년 사화의 원인이 되기도 하였다.

원래 길 건너 함양초등학교에 있는 학사루 느티나무(천연기념물 제407호) 옆에 있었으나, 1979년 지금의 위치로 옮겼다. 광풍루(경상남도 유형문화재 제92호), 함화루(경상남도 유형문화재 제258호)와 함께 함양의 3대 누각으로 꼽힌다.

참고자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