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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 화첩은 조선 전기 문신인 신말주(申末舟, 1429~1503)가 노년에 조직한 십로계(十老契)에 관한 사항을 정리하여 1499년에 제작한 화첩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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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선 전기 문신인 신말주(申末舟, 1429~1503)가 노년에 조직한 십로계(十老契)에 관한 사항을 정리하여 1499년에 제작한 화첩이다.
  
그는 1454년 생원시에 합격하고 같은 해 대과에 급제하였다. 이후 여러 관직을 역임하였고 70세가 되던 1498년에 관직에서 물러나 부인 설씨의 고향인 순창으로 귀향하였다. 귀래정(歸來亭)에서 본인을 포함한 70세가 넘은 노인 10명과 계회를 맺어 “십로계”라 이름 하였다. '''언제?''' 십로계첩(十老契帖)은 계를 맺은 연유와 목적, 성격, 행동 등을 기록하고 각각의 인물도를 그린 후 각 개인의 성품과 사상, 교훈적인 절구시를 첨부한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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신말주는 1454년 과거에 급제하고 여러 관직을 지냈으며, 1498년 70세의 나이로 은퇴한 후에는 부인의 고향인 순창으로 낙향하였다. 이듬해인 1499년에는 자신의 정자인 귀래정에서 70세 이상의 노인 9명과 함께 계를 결성하고 ‘십로계’라고 하였다.
  
이 화첩은 10벌을 만들어 각자 소유하였으나 그 가운데 신말주 본인의 것만 전해진다. 한 장에 인물 한 명을 배치하고 기물이나 배경은 소나무, 시녀, 바위 등으로 최소화하였다. 화면 상단에는 각 인물의 생활·인격·사상 등을 읊은 4행의 시를 적었다. 산수화 위주에 계회 장면을 작게 표현한 16세기 궁중의 계회도(契會圖)와는 달리 인물 위주로 표현한 점이 특징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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십로계의 결성을 기념하기 위하여, 신말주는 직접 그린 그림과 시 10점을 모아 화첩을 만들었다. 계의 참여한 노인 10명의 인물도를 그리고 각 인물의 성품과 사상을 읊은 시를 적었으며, 서문에는 계를 맺은 연유와 목적 등을 기록하였다. 화첩은 10벌을 만들어 각자 소유하였다고 하나, 신말주 본인의 것만 전해진다.  
  
이 화첩은 계회도로는 제작 시기가 이른 것에 속하고 궁중의 공식적인 모임인 계회도가 아닌 문인들의 사적인 계회를 그린 기록화라는 점에서 회화사적 가치가 있는 자료이며, 당시 노인들의 근세적 생활과 사상, 당대의 정치·사회·풍습을 엿볼 수 있는 자료로 평가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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문인들의 친목 모임을 기록한 이러한 계회도는 주로 16세기 이후에 유행하였으며, 십로계첩은 계회도로는 제작 시기가 이른 것에 속한다. 또한 궁중의 공식적인 모임이 아닌 문인들의 사적인 모임을 그린 기록화라는 점에서 회화사적 가치가 높다.
  
 
=='''문맥요소'''==
 
=='''문맥요소'''==

2020년 4월 30일 (목) 00:38 판


신말주선생의십로계첩
신말주 선생의 십로계첩, 국가문화유산포털, 문화재청.
대표명칭 신말주선생의십로계첩
한자 申末舟先生의十老契帖
주소 전라북도
지정번호 전라북도 유형문화재 제142호
지정일 1992년 6월 20일
분류 기록유산/서간류/간독류/간독
시대 조선시대
수량/면적 일괄11폭
웹사이트 신말주 선생의 십로계첩, 국가문화유산포털, 문화재청.



해설문

기존 국문

이 화첩은 귀래정(歸來亭) 신말주(申末舟, 1429~1503)선생이 이곳 순창에 낙향하여 은거생활을 하면서 뜻을 같이 하는 70세가 넘은 이윤철(李允哲), 설산옥(薛山玉), 장조평(張肇平), 조윤옥(趙潤屋) 등 10명의 노인들과 중국의 향산구로회(香山九老會)를 본떠 십로계(十老契)를 결성하였는데, 합 첩씩 계첩(契帖)을 1499년 봄에 제작하여 각기 나눠 가진 것으로 추정되지만, 현재는 신말주 본(本) 한 첩만 전하고 있다. 계회의 목적 등을 적은 서문과 함께 인물도(人物圖)의 배경은 소나무, 시녀, 바위 등 최소한으로 구성하였고, 인물도 우측 상단에는 각 인물의 생활, 인격, 사상들을 읊은 4행의 시가 적혀 있다. 특히 계회도(契會圖)로서는 제작 시기가 오래되었으며, 16세기 산수화 위주인 궁중의 계회도와 달리 문인들의 사적인 계회를 그린 기록화라는 점에서 회화사적 가치가 있다. 한편 1790년에 단원(檀園) 김홍도(金弘道)가 「십로계첩」을 모사하여 그린 「십로도상도(十老圖像圖)」가 호암미술관에 소장되어 있다.

수정 국문

초고

이 화첩은 조선 전기 문신인 신말주(申末舟, 1429~1503)가 노년에 조직한 십로계(十老契)에 관한 사항을 정리하여 1499년에 제작한 화첩이다.

그는 1454년 생원시에 합격하고 같은 해 대과에 급제하였다. 이후 여러 관직을 역임하였고 70세가 되던 1498년에 관직에서 물러나 부인 설씨의 고향인 순창으로 귀향하였다. 그는 1470년에 그의 호를 따서 이름을 지은 “귀래정(歸來亭)”이라는 정자에서 본인을 포함한 70세가 넘은 노인 10명과 계회를 맺어 “십로계”라 이름 하였다. 십로계첩(十老契帖)은 계를 맺은 연유와 목적, 성격, 행동 등을 기록하고 각각의 인물도를 그린 후 각 개인의 성품과 사상, 교훈적인 절구시를 첨부한 것이다.

이 화첩은 10벌을 만들어 각자 소유하였으나 그 가운데 신말주 본인의 것만 전해진다. 한 장에 인물 한 명을 배치하고 기물이나 배경은 소나무, 시녀, 바위 등으로 최소화하였다. 화면 상단에는 각 인물의 생활·인격·사상 등을 읊은 4행의 시를 적었다. 산수화 위주에 계회 장면을 작게 표현한 16세기 궁중의 계회도(契會圖)와는 달리 인물 위주로 표현한 점이 특징이다.

이 화첩은 계회도로는 제작 시기가 이른 것에 속하고 궁중의 공식적인 모임인 계회도가 아닌 문인들의 사적인 계회를 그린 기록화라는 점에서 회화사적 가치가 있는 자료이며, 당시 노인들의 근세적 생활과 사상, 당대의 정치·사회·풍습을 엿볼 수 있는 자료로 평가된다.

1차 수정

조선 전기 문신인 신말주(申末舟, 1429~1503)가 노년에 조직한 십로계(十老契)에 관한 사항을 정리하여 1499년에 제작한 화첩이다.

신말주는 1454년 과거에 급제하고 여러 관직을 지냈으며, 1498년 70세의 나이로 은퇴한 후에는 부인의 고향인 순창으로 낙향하였다. 이듬해인 1499년에는 자신의 정자인 귀래정에서 70세 이상의 노인 9명과 함께 계를 결성하고 ‘십로계’라고 하였다.

십로계의 결성을 기념하기 위하여, 신말주는 직접 그린 그림과 시 10점을 모아 이 화첩을 만들었다. 계의 참여한 노인 10명의 인물도를 그리고 각 인물의 성품과 사상을 읊은 시를 적었으며, 서문에는 계를 맺은 연유와 목적 등을 기록하였다. 화첩은 10벌을 만들어 각자 소유하였다고 하나, 신말주 본인의 것만 전해진다.

문인들의 친목 모임을 기록한 이러한 계회도는 주로 16세기 이후에 유행하였으며, 십로계첩은 계회도로는 제작 시기가 이른 것에 속한다. 또한 궁중의 공식적인 모임이 아닌 문인들의 사적인 모임을 그린 기록화라는 점에서 회화사적 가치가 높다.

문맥요소

Nodes

Links

참고자료

  • 정훈, 「귀래정 신말주 연구」, 『한국언어문학』 92, 한국언어문학회, 2015.
  • 『세조실록』, 『성종실록』
  • 『귀래정 실기』, 귀래정 실기 간행 위원회, 1994.
→ 기존 안내문 및 한국민족문화대백과사전, 한국향토문화전자대전에는 신말주에 대해 세조의 왕위 찬탈에 불만을 품고 낙향한 것으로 나온다. 그러나 이는 사실과 다르다.
그는 1454년(단종 2) 생원시에 합격하고 같은 해 대과에 급제하였다. 이후 1455년(세조 1) 계유정난의 공으로 원종공신에 녹훈되었고, 1456년(세조 2) 대에는 사간원 정언, 사간원 우정언, 1459년(세조 5) 종사관, 사간원 우헌납, 1461년(세조 7) 예조 정랑, 1464년(세조 10) 사간원 사간, 1466년(세조 12) 사간원 대사간, 형조 참의, 1476년(성종 7) 전주부윤, 1479년(성종 10) 진주목사 이후 창원부사, 경상우도 병마절도사, 사간원 대사간, 첨지중추부사, 전라수군절도사 등을 역임하였다.
그가 순창에 머문 시간은 부인의 병을 치료한다는 명목으로 낙향한 1470년(성종 1)부터 다시 기록에 등장한 1476년(성종 7)까지 대략 7년 정도의 기간과 70세가 되어 관직에서 물러난 1498년부터 죽음을 맞이한 1503년까지 6년 정도의 기간이다 .
결론적으로 그는 세조의 왕위 찬탈에 불만을 품은 절의의 인물이 아니다. 그의 절의와 은거하는 선비의 이미지는 그와 친분이 있고 세조 정권에 참여하였던 서거정과 강희맹 등에 의해 만들어진 것이다. 서거정은 신말주가 지은 정자인 귀래정에 대해 「귀래정기」를 지어 주었고, 강희맹은 「전주부윤귀래정공신도비명」을 지어 주었는데, 신말주가 세조 즉위 후 낙담하여 낙향하였으나 형인 신숙주의 강권에 의해 어쩔 수 없이 벼슬을 하였고 마음속으로는 항상 순창을 그리워하고 은거하려 했다고 하였다.
또한 그의 10대 후손인 신경준은 「유허비명」을 지어 그가 벼슬길에 나아갈 수밖에 없는 상황을 묘사하였다. 이는 신숙주의 문집이나 연대기 자료에는 볼 수 없는 기록으로 세조 정권 당시 관직에 나아간 신말주를 변호하는 입장에서 쓴 글이다.
그러므로 기존 안내문에 있는 신말주에 대한 설명은 재고해야 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