토론:최면식 선생 공적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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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20 국문

초고

포천 출신의 독립지사 최면식(1891-1944)의 공적비이다. 선생은 본관은 경주이며 면암 최익현의 손자이다. 1910년 국치를 당하자 국외로 망명하여 국권회복을 위해 국내에 잠입하여 군자금 및 무기조달에 전념하다가 체포되어 서대문경찰서에서 옥고를 치렀다. 1916년 광복단 조직을 위해 기호지방에서 활동하다가 만주로 건너가 김좌진 등과 우의를 다졌다. 선생은 국내에 잠입하여 전라도 지역 부호를 대상으로 군자금 수합에 힘을 쓰다가 목포에서 체포되어 2년여의 옥고를 치렀으나 이후 만주로 탈출하였다. 1921년 다시 입국했다가 광복단 사건으로 대전에서 체포되어 무기수로 공주형무소에서 복역 중에 병환이 악화되어 출옥한 뒤 순국했다. 1977년에 독립유공 대통령 표창을 받았고 1980년에 건국포장이 추서되었다. 이 공적비는 1982년에 포천 유지들의 정성으로 세웠다. 비문은 김상길이 글을 짓고, 이박교가 글씨를 썼다.

수정

포천 출신의 독립지사 최면식(崔勉植, 1891~1941)의 공적을 기리기 위해 1982년 포천 독립 유공비 건립 위원회에서 세운 비이다.

최면식은 위정척사사상과 항일운동으로 유명한 최익현(崔益鉉, 1833~1906)의 손자이다. 1910년 국외로 망명했으며, 국권회복을 위해 국내에 잠입하여 군자금 및 무기조달에 전념하다가 체포되어 서대문경찰서에서 옥고를 치렀다. 1916년 광복단 조직을 위해 기호지방에서 활동하다가 만주로 건너가 1917년 김좌진(金佐鎭, 1889~1930) 등이 이끄는 대한광복회에 가입하여 활동하였다. 이후 다시 국내에 잠입하여 전라도 지역 부호를 대상으로 군자금 수합에 힘을 쏟았다. 그러던 중 목포에서 체포되어 옥고를 치렀다. 출옥 후 대한광복회의 재건에 힘쓰다가 1921년 또다시 체포되었다. 무기수로 공주형무소에서 복역 중에 고문의 후유증으로 병환이 악화되어 출옥한 뒤 순국했다. 1977년에 독립유공 대통령 표창을 받았고, 1980년 건국포장, 1990년 건국훈장 애국장이 추서되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