화산 신도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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화산 신도비
Stele of Gwon Ju
화산신도비, 문화재청 국가문화유산포털.
대표명칭 화산 신도비
영문명칭 Stele of Gwon Ju
한자 花山 神道碑
주소 경상북도 안동시 풍천면 가곡리 산41
지정번호 경상북도 문화재자료 제65호
지정일 1985년 8월 5일
분류 기록유산/서각류/금석각류/비
수량/면적 1기
웹사이트 화산신도비, 문화재청 국가문화유산포털.



해설문

국문

2017

이 비는 조선의 문신인 화산 권주(權柱, 1457~1505)의 신도비이다. 권주는 자가 지경(支卿)이고 본관은 안동이다. 성종(成宗) 5년(1474) 진사(進士)가 되어, 1480년에 친시문과(親試文科)에 갑과(甲科)로 급제하였다. 연산군(燕山君) 3년(1497)에 도승지(都承旨)에 임명된 이후 충청도(忠淸道) 및 경상도관찰사(慶尙道觀察使), 예조참판(禮曹參判) 등을 역임한 후 중종(中宗) 때 의정부(議政府) 우참찬(右參贊)에 추증되었다.

이 비는 숙종(肅宗) 37년(1711)에 세워졌으며 전체 높이 1.45m, 폭 75cm, 두께 27cm이다. 장방형의 좌대(座臺) 위에 비신(碑身)과 용모양의 비머리(螭首)를 갖추었다. 비문(碑文)은 퇴계학파의 정통을 계승하고 숙종 때 이조참판(吏曹參判)을 지낸 남인의 대표적 인물인 갈암(葛庵) 이현일(李玄逸)이 짓고 김천도찰방(金泉道察訪)을 지낸 이유(李濰)가 썼다. 비각은 1981년 10월에 지은 것이다.

2021

화산 신도비는 조선시대의 학자이자 문신인 화산 권주(花山 權柱, 1457~1505)를 기리기 위해 숙종 37년(1711)에 세워졌다. 신도비란 임금이나 벼슬이 높은 사람의 일생과 업적을 기록하여 세우는 비석으로, 대개 무덤 앞이나 무덤의 남동쪽에 세운다. 신도(神道)는 신(神)이 묘역에 이르는 길을 뜻한다.

안동에서 태어난 권주는 성종 5년(1474)에 과거에 급제한 후 여러 관직을 역임하였다. 승정원의 관직을 지내던 중인 성종 13년(1482) 연산군의 생모 폐비 윤씨에게 사약을 받들고 갔는데, 이 때문에 연산군 10년(1504) 갑자사화(甲子士禍) 때 파직되고 이듬해 사약을 받아 생을 마쳤다.

화산 신도비는 넓은 사각형 받침돌, 몸돌, 구름과 용으로 장식된 머릿돌로 이루어져 있으며, 전체 높이는 1.45m이다. 비문은 이황(李滉, 1501~1570)의 학문을 정통으로 계승하며 경상도 지역을 대표하는 학자로 자리매김한 이현일(李玄逸, 1627~1704)이 지었고, 글씨는 이유(李濰, 1669~1742)가 썼다. 비석을 보호하고 있는 비각은 1981년에 지어졌다.

영문

  • Stele of Gwon Ju

2017

This is the stele of Gwon Ju (1457-1505) from the Andong Gwon Clan, a civil official of the early Joseon period. He passed the state examination in 1480 and served various high posts including chief royal secretary, governor of Chungcheong-do and Gyeongsang-do, and vice minister of rites.

During the reign of King Yeonsangun (r. 1494-1506), Gwon was sent into exile and killed by the king for having been involved in the execution of the king’s mother in 1482. Gwon was posthumously reinstated during the reign of King Jungjong (r. 1506-1544) and promoted to a state councilor.

This stele was erected in 1711, and its epitaph was composed by Yi Hyeon-il (1627-1704), a renowned scholar of the late Joseon period. The pavilion housing this stele was built in 1981. To the west of this stele is a lecture hall commemorating Gwon’s academic accomplishments.

2021

This stele was erected in 1711 to commemorate the life and achievements of the scholar and civil official Gwon Ju (1457-1505).

Gwon Ju passed the state examination in 1474 and served various official posts. In 1482, when the Deposed Queen Yun was sentenced to death by poison, Gwon was tasked with presenting the poison to her as part of his duties as a chief scribe at the Royal Secretariat. Because of this, during the reign of the Queen Yun’s son King Yeonsangun (r. 1494-1506), Gwon Ju was removed from office in the Literati Purge of 1504 and sentenced to death by poison the following year.

The stele consists of a wide rectangular pedestal, a body stone with an inscription, and a capstone engraved with cloud and dragon designs. It measures 1.45 m in total height. The inscription was composed by Yi Hyeon-il (1627-1704), who was a representative scholar of the Gyeongsang-do region, and calligraphed by Yi Yu (1669-1742). The protective pavilion was built in 1981.

영문 해설 내용

2017

이 비는 조선 전기의 문신인 권주(權柱, 1457~1505)의 신도비이다. 권주는 1480년 문과에 급제하고, 도승지, 충청도 및 경상도 관찰사, 예조참판 등을 역임하였다.

연산군(재위 1494-1506)의 생모가 1482년 사약을 받았는데, 권주는 이때 관여했다는 이유로 유배되었다가 결국 사사되었다. 사후 중종(재위 1506-1544) 대에 신원되었고 우참찬에 추증되었다.

신도비는 1711년에 세워졌으며, 비문은 조선 후기의 학자인 이현일(李玄逸)이 지었다. 신도비를 모신 비각은 1981년에 지은 것이다. 신도비의 서쪽에는 권주가 수학한 자리를 기념하기 위해 세워진 선원강당(仙源講堂)이 있다.

2021

학자이자 문신인 권주(1457-1505)의 생애와 업적을 기리기 위해 1711년에 세운 비석이다.

권주는 1474년에 과거에 급제한 후 여러 관직을 역임하였다. 1482년 폐비 윤씨가 사약을 받게 되었을 때, 권주가 승정원의 관원으로서 사약을 받들고 갔다. 이 때문에 윤씨의 아들인 연산군(재위 1494-1506)이 왕이 된 이후, 1504년 사화 때 파직되었고 이듬해 사약을 받았다.

이 신도비는 넓은 사각형 받침돌, 비문이 새겨진 몸돌, 구름과 용으로 장식된 머릿돌로 이루어져 있으며, 전체 높이는 1.45m이다. 비문은 경상도 지역을 대표하는 학자 중 한 명인 이현일(1627-1704)이 지었고, 글씨는 이유(1669-1742)가 썼다. 비석을 보호하고 있는 비각은 1981년에 지어졌다.

참고자료

  • 화산 신도비, 문화재청 국가문화유산포털 http://www.heritage.go.kr/heri/cul/culSelectDetail.do?ccbaCpno=3413700650000&pageNo=1_1_1_1 -> 신도비란 왕이나 고관 등의 평생업적을 기록하여 그의 묘 남동쪽에 세워두는 것으로, 이 비는 조선 전기의 문신인 화산 권주(1457∼1505) 선생을 기리고 있다. 화산은 세조 3년(1457)에 태어나, 24세에 과거에 급제하여 벼슬길에 올랐다. 성종 20년(1489)에는 공조정랑으로 있으면서 질정관이 되어 요동지역을 다녀오기도 하였으며, 성종 24년(1493) 12월에서 이듬해 8월까지는 경차관이 되어 대마도를 다녀오기도 하였다. 연산군 3년(1497)에는 도승지에까지 이르렀으며, 1499년에는『성종실록』의 편찬에도 참여하였다. 연산군 10년(1504) 갑자사화가 일어나자 예전에 그가 연산군의 생모인 폐비윤씨에게 사약을 받들고 갔다는 이유로 파직되었고, 이 후에도 이 일로 죄를 추궁당하여 연산군 11년(1505) 사약을 받고 생을 마쳤다. 중국어에도 능하여 명나라와의 외교활동에서도 중요한 일을 맡아하였고, 성품도 검소하고 단아하여 맡은 일에 최선을 다하였던 이라고 한다. 비는 낮고 넓적한 사각받침돌 위에 비몸을 세우고, 머릿돌을 올린 모습으로, 숙종 37년(1711)에 세웠다. 비문은 이조판서를 지냈던 이현일이 글을 짓고, 이유의 글씨로 하여 새겨놓았다. 1981년 새로이 비각을 지어 비를 보호하고 있다.
  • 갈암금양강도지 항목 참조 -> 이현일 관련 정보 / 이현일은 영해부(지금의 영덕 지역)에서 태어났다. 1646년과 1648년 연거푸 소과에서 불합격한 뒤 과거에 뜻을 접고 학문에 전념하였다. 이후 학문으로 명성이 높아져 1677년에 관직 생활을 시작하였고 1693년 이조판서가 되었다. 그러나 정쟁에 휘말려 이듬해 유배되었으며, 1699년에 풀려난 이후로는 1700년부터 이곳(안동)에 머물며 후진 양성에 힘을 기울였다. 이현일은 조선의 저명한 학자인 이황(1501~1570)의 학문을 정통으로 계승한 인물로, 당시 경상도 지역을 대표했던 학자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