해학 이기 선생 생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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해학 이기 선생 생가
Birthplace of Yi Gi
해학 이기 선생 생가, 국가문화유산포털, 문화재청.
대표명칭 해학 이기 선생 생가
영문명칭 Birthplace of Yi Gi
한자 海鶴 李沂 先生 生家
주소 전라북도 김제시 성덕면 대석3길 41 (대석리)
지정(등록) 종목 전라북도 기념물 제118호
지정(등록)일 2003년 12월 26일
분류 유적건조물/인물사건/인물기념/탄생지
수량/면적 일원(863㎡)
웹사이트 해학 이기 선생 생가, 국가문화유산포털, 문화재청.



해설문

국문

해학 이기 선생 생가는 조선 후기에 건립되었다. 원래 안채 1동과 사랑채 1동의 초가집이었으나 2003년 12월 26일 전라북도 기념물로 지정하고 훼손된 안채를 정면 4칸, 측면 2칸의 초가로 복원하였다.

이기(1848~1909)는 근대 실학자이자 독립운동가이다. 을사조약이 체결될 당시 귀국하여 1906년 장지연·윤효정 등과 대한자강회를 조직하여 사회 계몽운동을 벌였다. 1907년 3월에는 나인영 등 10여 명의 동지와 협의하여 결사대인 자신회를 조직하고 을사오적 암살을 시도하다 실패하여 7년의 유배형을 받기도 하였다. 고종의 특사로 석방된 후 상경하여 〈호남학보〉를 발간하는 등 독립을 위한 민중 계몽운동에 힘을 쏟았다.

영문

Birthplace of Yi Gi

This is the birthplace of Yi Gi (1848-1909), a scholar and prominent leader of the anti-Japanese movement at the end of the Joseon period (1392-1910). The house originally consisted of a men’s quarters and women’s quarters, but the men’s quarters was demolished. The women’s quarters, which had been significantly remodeled for modern living, was renovated into a more traditional style after being designated as a cultural heritage 2003.

Yi Gi gained expertise in a wide range of subjects and advocated for adopting Western technological, political, and economic achievements and worked to promote rural enlightenment. In 1906, one year after Korea was made a protectorate of Japan under an illegal treaty, he participated in the establishment of the Korea Self-reliance Association. In January 1907, he attempted to assassinate the five Korean ministers who had agreed upon the protectorate treaty, but failed and was exiled. By the special amnesty of King Gojong (r. 1863-1907), he was released. Until his death, he continued his enlightenment work and the struggle against Japan’s encroachment on Korea’s sovereignty.

영문 해설 내용

이곳은 학자이자 독립운동가였던 이기(1848-1909)의 생가가 있던 곳이다. 원래의 생가는 안채와 사랑채로 이루어져 있었지만, 사랑채는 허물었다. 근대식 생활 양식에 맞춰 개조하였던 안채는 2003년 문화재로 지정된 이후 전통 양식에 따라 고쳐 지었다.

이기는 다양한 학문을 섭렵하면서 신문물을 도입할 것을 주장하였고, 계몽운동에도 힘썼다. 을사조약이 체결된 이듬해인 1906년에는 대한자강회를 조직하였고, 1907년 2월에는 을사조약에 찬성한 다섯명의 대신을 암살하려다 실패하여 유배형을 받기도 하였다. 그해 겨울 고종의 특사로 석방되었고, 이후 사망할 때까지 계속해서 민중 계몽과 항일운동에 매진하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