토론:함양 최치원 신도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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기존 국문
신라 진성여왕 때 천령군태수로 있던 고운 최치원이 홍수를 막기 위해 제방을 쌓고 숲을 만든 고적을 기려 세운 비석, 최치원은 자는 고운 또는 해운으로 당에 유학하여 빈공과에 급제하고 중국에서 문명을 떨쳤다. 신라로 돌아온 뒤 당시 국정의 문란함에 실망하여 대산, 천령, 부산 등의 태수를 지내다가 마지막에는 가야산 해인사에 은거하여 종적을 감추었다고 한다. 시호는 문창이다. 이 비석은 1923년 문중에서 세운 것이다.
수정 국문
초고
통일신라 말기의 문장가 고운 최치원(孤雲 崔致遠, 857~?)의 신도비(神道碑)이다. 신도비란 임금이나 벼슬이 높은 사람의 일생과 업적을 새겨서 그의 묘(墓) 남동쪽에 세워두는 비석을 말한다. 최치원이 세상을 떠난 해와 그 묘를 알 수 없지만, 1923년 경주최씨 문중은 최치원이 태수로 있었던 천령군(天嶺郡), 지금의 함양에 최치원의 공적을 기리는 신도비를 세웠다.
최치원은 12세에 당나라로 유학을 가서 18세에 과거에 급제하고, 879년 황소의 난이 일어나자 토황소격문(討黃巢檄文)을 지었다. 885년(헌강왕 11)에 신라로 돌아와 894년 진성여왕에게 시무책 10여조를 올렸으나 개혁안은 실현되지 못했다. 최치원은 결국 관직을 버리고 전국을 떠돌다 가야산 해인사로 들어가 남은 생을 마쳤다.
신도비에는 최치원이 천령군 태수로 있을 때 고을의 홍수를 막기 위해 둑을 쌓고 손수 숲을 조성했던 일과 민심을 위로했던 치적 등이 새겨져 있다.
1차 수정
통일신라 말기의 문장가 고운 최치원(孤雲 崔致遠, 857~?)의 신도비이다. 신도비란 임금이나 벼슬이 높은 사람의 일생과 업적을 새겨서 무덤 근처에 세워두는 비석을 말한다. 최치원이 세상을 떠난 해와 묘의 위치는 알 수 없지만, 1923년 경주최씨 문중은 최치원이 태수로 있었던 천령군(天嶺郡, 지금의 함양)에 최치원의 공적을 기리는 신도비를 세웠다.
최치원은 868년 12세의 어린 나이에 당나라로 유학을 가서 18세 때 과거에 급제하였다. 879년 황소(黃巢)가 민란을 일으키자 잘못을 꾸짖고 항복을 권유하는 토황소격문(討黃巢檄文)을 지었고, 이때부터 문장가로 이름을 떨쳤다. 885년에 신라로 돌아와 어지러운 정치를 바로잡고자 힘썼으나 그가 제시한 개혁안은 실현되지 못했다. 좌절한 최치원은 결국 관직을 버리고 전국을 떠돌다 가야산 해인사로 들어가 남은 생을 마쳤다.
신도비에는 최치원이 천령군 태수로 있을 때 고을의 홍수를 막기 위해 둑을 쌓고 손수 숲을 조성했던 일과 민심을 위로했던 치적 등이 새겨져 있다.
자문의견
- 분야별 자문위원 1
- 통일신라 말기 학자 겸 정치인, 문장가인 고운 최치원(孤雲 崔致遠, 857~?)의 신도비이다.
- 최치원은 868년(경문왕 8) 12세에 당나라로 유학 가서, 18세 때 당나라의 과거 시험(빈공과)에 급제하였다. 879년(헌강왕 5) 황소(黃巢)의 난이 발생했을 때, 항복을 권유하는 토황소격문(討黃巢檄文)을 지어 문장가로 이름을 떨쳤다. 885년(헌강왕 11)에 귀국하여 어지러운 정치를 바로잡고자 개혁안을 제시했지만 실현되지 못했다. 진성여왕(887~897) 재임 시 천령군(天嶺郡, 지금의 함양)의 태수를 역임한 이후, 관직을 버리고 전국을 떠돌다 가야산 해인사로 들어가 생을 마감했다.
- 최치원이 세상을 떠난 해와 묘의 위치는 알 수 없지만, 1923년 경주최씨 문중에서 태수직을 역임했던 천령군에 공적을 기리는 신도비를 세웠다. 신도비란 임금이나 벼슬이 높은 사람의 일생과 업적을 새겨서 무덤의 동남쪽에 세운 비석을 말한다. 조선시대 이후에는 정2품 이상의 뚜렷한 공적과 학문이 뛰어나 후세의 교훈이 되는 사람을 위해 세웠다.
- 최치원 신도비에는 천령군 태수 역임 시 고을의 홍수를 막기 위해 둑을 쌓고 숲을 조성했던 일과 민심을 위로했던 업적 등이 기록되어 있다. 납작한 거북받침돌 위에 비몸을 세우고, 용무늬를 새긴 머릿돌을 올려놓은 모습이다.
- 분야별 자문위원 2
- 가야산 해인사로 들어가 남은 생을 마쳤다. → 이 내용은 확실한 근거가 없으므로, “전해진다” 정도로 정리함이 타당할 듯.
- 읽기쉬운문안 자문위원
- 수정사항 없음.
2차 수정
통일신라 말기의 문장가 고운 최치원(孤雲 崔致遠, 857~?)의 신도비이다. 신도비란 임금이나 벼슬이 높은 사람의 일생과 업적을 새겨서 무덤의 동남쪽에 세워두는 비석을 말한다. 최치원이 세상을 떠난 해와 묘의 위치는 알 수 없지만, 1923년 경주최씨 문중은 최치원이 태수로 있었던 천령군(天嶺郡, 지금의 함양)에 최치원의 공적을 기리는 신도비를 세웠다.
최치원은 868년 12세의 어린 나이에 당나라로 유학을 가서 18세 때 과거에 급제하였다. 879년 황소(黃巢)가 민란을 일으키자 잘못을 꾸짖고 항복을 권유하는 토황소격문(討黃巢檄文)을 지었고, 이때부터 문장가로 이름을 떨쳤다. 885년에 신라로 돌아와 어지러운 정치를 바로잡고자 힘썼으나 그가 제시한 개혁안은 실현되지 못했다. 좌절한 최치원은 결국 관직을 버리고 전국을 떠돌다 가야산 해인사로 들어가 남은 생을 마쳤다고 전해진다.
신도비에는 최치원이 천령군 태수로 있을 때 고을의 홍수를 막기 위해 둑을 쌓고 손수 숲을 조성했던 일과 민심을 위로했던 치적 등이 새겨져 있다.
참고자료
- 최치원, 한국민족문화대백과사전
- 함양 최치원 신도비, 문화재청 국가문화유산포털