토론:함양 용추사 일주문
2021 안내문안 초안 작성 지원 사업
기존 국문
일주문은 절 입구에 좌우 하나씩의 기둥으로 받쳐 세운 문으로, 속세(俗世)를 떠나 부처의 세계로 들어가는 첫 관문이다. 항상 한결같은 마음으로 수도하고 교화하라는 의미에서 세운 문이다. 이곳 용추계곡에는 487년(신라 소지왕9)에 각연대사(覺然大師)가 창건하였다고 하는 장수사(長水寺)가 있었다. 장수사는 신라시대의 원효(元曉)와 의상(義湘)을 비롯해, 조선시대의 무학(舞鶴), 서산(西山), 사명(四溟)둥 여러 고숭이 수도한 이름이 있는 절이었고, 용추사는 원래 장수사에 딸린 작은 암자였다. 그런데 6.25 전쟁 때 장수사가 일주문만 남고 타버리자 1959년에 중건하면서 아름을 용추사로 바꾸었다. “덕유산 장수사 조계문(德裕山 長水寺 曹溪門)”이라고 쓰여 있는 일주문 현판만이 장수사의 흔적을 말해준다. 이 일주문은 숙종28년(1702)에 건립된 것으로 알려져 있다.
일반적인 일주문이 그렇게 크지 않는 보통의 맞배지붕으로 만들어진데 비해, 이 일주문은 화려한 다포계(多包系) 팔작(八作)지붕의 양식을 하고 있는 점이 특이하다. 기둥 간격 4m, 직경 1.2m가 넘는 튼튼한 기둥에 떠 바쳐진 일주문은 그 규모가 매우 장대하다. 화려하고 웅장한 모습의 지붕 때문에 기둥이 오히려 작아 보일 정도이다. 혀를 말아 올린 듯이 길게 뻗어 나간 장식들은 기둥 위에서 구름과 연꽃으로 피어오르고, 기둥머리의 봉황조각은 길게 돌출된 서까래와 함께 처마선을 타고 올라 천상세계가 바로 여기라고 보여고 있는 듯하다.
아마 이곳에서부터 부처의 극락세계가 시작된다는 종교적 의미를 상징적이면서도 장엄하고 화려한 구조로 표현한 것 같다.
수정 국문
초고
일주문은 건물의 기둥이 일렬로 나란히 배치되는 데서 붙여진 이름이며, 사찰로 진입하는 입구를 표시한다. 한국의 사찰 대부분에 지어지며, 사찰의 주요 영역으로 들어가기 위한 첫 번째 문으로, 사찰의 이름이 적힌 현판이 걸려있다. 일주문이라는 이름은 사찰 영역에 들어오기 전에 세속의 번뇌를 씻고 한결같은 마음을 가질 것을 상징한다.
용추사의 일주문은 1702년에 건립되었다고 하며, 남쪽에 걸려있는 현판에는 ‘장수사(長水寺)’라는 이름이 확인된다. 장수사는 용추사의 본찰이었던 곳으로 487년 각연대사가 창건했다고 전하며, 일주문이 세워진 1702년 중건되었으나 한국전쟁 때 일주문을 제외한 가람 전체가 불에 타서 사라졌다. 1959년에 절을 다시 지으면서 이름을 용추사로 바꾸었지만, 일주문의 현판은 그대로 두었다고 한다. 지금의 일주문은 1975년에 중건한 것이다.
용추사의 일주문은 다른 사찰의 일주문과 비교했을 때 규모가 큰 편이다. 굵은 원기둥의 앞뒤에 보조 기둥을 덧대어 세웠으며, 화려한 팔작지붕 아래에는 지붕의 무게를 받치는 부재이자 장식을 겸하는 공포(栱包)를 촘촘하게 짜 올렸다.
1차 수정
일주문은 사찰에 들어가는 첫 번째 관문으로, 기둥이 한 줄로 늘어서 있다고 하여 붙여진 이름이다. 한 줄의 기둥은 일심(一心)을 뜻하며, 사찰에 들어오기 전 세속의 번뇌를 씻고 한결같은 마음을 가질 것을 상징한다. 일주문에는 사찰의 이름이 적힌 현판을 걸어 놓는다.
용추사의 일주문은 1702년에 건립된 것으로 알려져 있으며, 1975년에 중건하였다. 정면에 걸린 현판에는 ‘덕유산 장수사 조계문(德裕山 長水寺 曹溪門)’이라고 쓴 현판이 걸려있는데, 이는 용추사의 예전 이름이 장수사이기 때문이다.
장수사는 487년 각연대사가 창건하였다. 일주문이 세워진 1702년 중건되었으나 한국전쟁 때 일주문을 제외한 가람 전체가 불에 타서 사라졌다. 1959년에 절을 다시 지으면서 이름을 용추사로 바꾸었지만, 일주문의 현판은 그대로 두었다고 한다.
일반적으로 일주문은 규모가 크지 않고 맞배지붕으로 만드는데, 용추사의 일주문은 화려한 팔작지붕을 올렸고 유례를 찾기 어려울 정도로 장대한 규모이다. 건물의 기둥 간격은 약 4m이고, 기둥 높이는 약 3m이며, 기둥 둘레는 약 3m이다. 팔작지붕 아래에는 지붕의 무게를 받치는 부재이자 장식을 겸하는 공포(栱包)를 촘촘하게 짜 올렸다.
자문의견
- 분야별 자문위원 1
- 일주문은 사찰에 들어가는 첫 번째 관문으로, 기둥이 한 줄로 늘어서 있다고 하여 붙여진 이름이다. 한 줄의 기둥은 일심(一心)을 뜻하며, 사찰에 들어오기 전 세속의 번뇌를 씻고 한결같은 마음을 가질 것을 상징한다. 일주문에는 사찰의 이름이 적힌 현판을 걸어 놓는다. . --> 사찰에 들어가는 첫 번째 관문인 일주문은 인간의 세계와 부처님의 세계를 구분하는 경계의 역할을 하는 문이다. 사찰에 들어오기 전 세속의 번뇌를 씻고 한결같은 마음을 가지라는 권고를 상징하는 것이다. 두 개의 기둥을 한 줄로 세우고 지붕을 올렸다 하여 일주문이라 부르고 있으며, 이 문에는 사찰의 이름이 적힌 현판을 걸어놓는다.
- 장수사는 487년 각연대사가 창건하였다. 일주문이 세워진 1702년 중건되었으나 한국전쟁 때 일주문을 제외한 가람 전체가 불에 타서 사라졌다. 1959년에 절을 다시 지으면서 이름을 용추사로 바꾸었지만, 일주문의 현판은 그대로 두었다고 한다. --> 487년 각연대사가 창건한 장수사는 일주문이 세워진 조선 숙종 28년(1702)에 중건되었으나 한국전쟁 때 일주문을 제외한 가람 전체가 불에 타서 사라졌다. 1959년에 절을 다시 지으면서 이름을 용추사로 바꾸었지만, 일주문의 현판은 그대로 두었다고 한다.
- 분야별 자문위원 2
- 용추사 일주문의 초창 내역 추가 ->「경상남도안의군지대면장수사용추암창수원류흥폐부안록(慶尙南道安義郡知代面長水寺龍湫菴創修源流興廢符案錄)」에 따르면 함양 장수사 조계문은 1702년(숙종 28)에 호남사혜(湖南社慧)에 의하여 건립되었음을 알 수 있다.
- 읽기 쉬운 문안 자문위원
- 수정 문안의 마지막 단락은 기존 문안의 내용을 첨가하면 더 돋보일 듯 합니다. 예를 들면, “일반적으로 사찰의 일주문은 크지 않은 맞배지붕이다. 그러나 용주사 일주문은 팔작지붕 양식을 하고 있는 점이 특이하다. 기둥 간격 4m, 직경 1.2m가 넘는 튼튼한 기둥에 떠받쳐진 일주문은 그 규모가 매우 장대하다. 화려하고 웅장한 모습의 지붕 때문에 기둥이 오히려 작아 보일 정도이다. 말아 올린 듯 길게 뻗어 나간 장식들은 기둥 위에서 구름과 연꽃으로 피어오르고, 머리 부분의 봉황조각은 길게 돌출된 서까래와 함께 처마선을 타고 올라 천상세계가 바로 여기라고 보여주는 듯하다.”
2차 수정
일주문은 사찰에 들어가는 첫 번째 관문으로, 인간의 세계와 부처님의 세계를 구분하는 경계의 역할을 하는 문이다. 사찰에 들어오기 전 세속의 번뇌를 씻고 한결같은 마음을 가지라는 권고를 상징한다. 두 개의 기둥을 한 줄로 세웠다 하여 일주문이라 부르고 있으며, 이 문에는 사찰의 이름이 적힌 현판을 걸어놓는다.
용추사의 일주문은 1702년에 건립된 것으로 알려져 있으며, 1975년에 중건하였다. 정면에 걸린 현판에는 ‘덕유산 장수사 조계문(德裕山 長水寺 曹溪門)’이라고 쓴 현판이 걸려있는데, 이는 용추사의 예전 이름이 장수사이기 때문이다.
487년 각연대사가 창건한 장수사는 일주문이 세워진 1702년 중건되었으나 한국전쟁 때 일주문을 제외한 가람 전체가 불에 타서 사라졌다. 1959년에 절을 다시 지으면서 이름을 용추사로 바꾸었지만, 일주문의 현판은 그대로 두었다고 한다.
일반적으로 사찰의 일주문은 크지 않은 맞배지붕이나, 용주사 일주문은 팔작지붕 양식을 하고 있는 점이 특이하다. 기둥 간격 4m, 직경 1.2m가 넘는 튼튼한 기둥에 떠받쳐진 일주문은 그 규모가 매우 장대하다. 말아 올린 듯 길게 뻗어나간 장식들은 기둥 위에서 구름과 연꽃으로 피어오르고, 머리 부분의 봉황 조각은 길게 돌출된 서까래와 함께 처마선을 타고 올라 천상세계가 바로 여기라고 보여주는 듯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