토론:함양 양희 신도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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기존 국문

이 문화재는 구졸암(九拙菴) 양희(梁喜, 1515~1580)의 신도비이다. 구졸암은 노진(盧禛), 이후백(李後白)과 함께 이른바 천령삼걸(天嶺三傑)의 일인으로, 1546년 문과에 급제하여 여러 관직을 두루 거쳐 대사간(大司諫)에 이르렀으며, 숙종 때 이조판서에 추증되었다. 본 신도비는 1858년에 세워진 것이나 석재 자체는 구졸암의 손자에 의해 이미 약 350여 년 전에 다듬어진 것이라고 한다.

이 신도비의 비문은 대제학 이덕수(李德壽, 1673~1744)가 찬술하였고, 글씨는 호조참판 노광두(盧光斗, 1772~1859)가 썼다. 비문의 내용 가운데는 당시 중앙정계와 경상우도 유림의 동향을 알 수 있는 부분이 많아 문화재적 가치가 더욱 높이 평가된다.

수정 국문

초고

이 신도비는 조선 중기의 문신인 양희(梁喜, 1515~1580)의 학덕을 기리기 위해 그의 후손들이 1858년에 건립한 것이다.

그는 1540년에 진사에 급제하였고, 1546년에 문과에 급제한 뒤 여러 관직을 역임하였으며, 󰡔명종실록󰡕의 편찬에 참여하기도 했다. 명나라에 사신으로 다녀오는 길에 1580년 중국 옥하관에서 병사하였다. 이후 숙종 때 이조판서에 추증되고, 함양의 구천사(龜川祠)에 제향되었다.

그는 이 지역 출신인 노진(盧禛, 1518~1578), 이후백(李後白, 1520~1578)과 함께 “천령삼걸(天嶺三傑)”로 불렸는데, 천령은 함양의 옛 지명이다. 스스로 아홉 가지의 옹졸함을 지녔다는 뜻으로 “구졸암(九拙菴)”이라는 호를 사용했고, 항상 자신의 학문이 모자란다는 생각으로 평생 학문에 몰두하였다.

이 신도비의 비문은 대제학 이덕수(李德壽, 1673~1744)가 찬술하였고, 글씨는 호조참판 노광두(盧光斗, 1772~1859)가 썼다. 비문의 내용 가운데는 당시 중앙정계와 경상우도 유림의 동향을 알 수 있는 부분이 많아 문화재적 가치가 더욱 높이 평가된다.

1차 수정

조선 중기의 문신인 양희(梁喜, 1515~1580)의 학덕을 기리기 위해 그의 후손들이 1858년에 세운 신도비이다. 신도비란 임금이나 벼슬이 높은 사람의 일생과 업적을 새겨서 무덤 근처에 세워두는 비석을 말한다.

양희는 1546년에 과거에 급제한 뒤 여러 관직을 역임하였으며, 󰡔명종실록󰡕의 편찬에 참여하기도 했다. 스스로 ‘아홉 가지의 옹졸함을 지녔다’는 뜻으로 구졸암(九拙菴)이라는 호를 사용했고, 항상 배움이 모자란다고 생각하며 평생 학문에 몰두하였다. 1580년 명나라에 사신으로 다녀오는 길에 북경에 있던 사신들의 숙소인 옥하관에서 병사하였다.

신도비의 비문은 이덕수(李德壽, 1673~1744)가 지었고, 글씨는 노광두(盧光斗, 1772~1859)가 썼다. 비문의 내용 가운데는 당시 중앙정계와 경상우도 유림의 동향을 알 수 있는 부분이 많아 문화재적 가치가 높다.

자문의견

  1. 분야별 자문위원 1
    • 조선 중기 문신 양희(梁喜, 1515~1580, 본관; 남원)의 학덕을 기리기 위해 후손들이 1858년(철종 9)에 세운 신도비이다. 신도비란 임금이나 벼슬이 높은 사람의 일생과 업적을 새겨서 무덤의 동남쪽에 세운 비석을 말한다. 조선시대 이후에는 정2품 이상의 뚜렷한 공적과 학문이 뛰어나 후세의 교훈이 되는 사람을 위해 세웠다.
    • 양희는 1546년(명종 1) 과거에 급제한 뒤 여러 관직을 역임하였으며, 󰡔명종실록󰡕의 편찬에도 참여했다. 스스로 ‘아홉 가지 옹졸함을 지녔다’는 뜻으로 구졸암(九拙菴)이라는 호를 사용했고, 배움이 모자란다는 생각으로 평생 학문에 몰두하였다. 명나라 사신으로 다녀오던 1580년(선조 13)에 북경의 사신 숙소인 옥하관에서 병사하였다.
    • 비각 뒤쪽에 선생의 유적지 대고대가 있으며, 청백리 집안의 후예로서 천령(함양) 삼걸이라 불렸다. 비문은 이조판서를 역임한 이덕수(李德壽, 1673~1744, 본관; 전의)가 지었고, 글씨는 호조참판을 역임한 노광두(盧光斗, 1772~1859, 본관; 풍천)가 썼다. 비문의 내용 중 당시 중앙정계와 경상우도 유림의 동향을 알 수 있는 부분이 많아 역사자료적 가치가 높다.
  2. 분야별 자문위원 2
    • 편찬에 참여하기도 했다. → 편찬에도 참여하였다.
    • 1580년 명나라에 사신으로 다녀오는 길에 북경에 있던 사신들의 숙소인 옥하관에서 병사하였다. → 1580년 명나라에 사신으로 갔다가 북경에 있던 사신들의 숙소인 옥하관에서 병사하였다.
  3. 읽기쉬운문안 자문위원
    • 수정사항 없음.

2차 수정

조선 중기의 문신인 양희(梁喜, 1515~1580)의 학덕을 기리기 위해 그의 후손들이 1858년에 세운 신도비이다. 신도비란 임금이나 벼슬이 높은 사람의 일생과 업적을 새겨서 무덤 동남쪽에 세워두는 비석을 말한다.

양희는 1546년에 과거에 급제한 뒤 여러 관직을 역임하였으며, 『명종실록』의 편찬에도 참여하였다. 스스로 ‘아홉 가지의 옹졸함을 지녔다’는 뜻으로 구졸암(九拙菴)이라는 호를 사용했고, 항상 배움이 모자란다고 생각하며 평생 학문에 몰두하였다. 1580년 명나라에 사신으로 갔다가 북경에 있던 사신들의 숙소인 옥하관에서 병사하였다.

신도비의 비문은 이덕수(李德壽, 1673~1744)가 지었고, 글씨는 노광두(盧光斗, 1772~1859)가 썼다. 비문의 내용 가운데는 당시 중앙정계와 경상우도 유림의 동향을 알 수 있는 부분이 많아 문화재적 가치가 높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