토론:함양 노참판댁 고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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기존 국문

조선 말기 우리나라 바둑계의 일인자였던 사초 노근영(盧近泳, 1875~1944)선생이 태어난 곳이다.

선생의 호가 사초여서 사람들은 노사초라고 즐겨 불렀으며 성품은 온화하면서도 검소하였고 어려운 사람들에게는 아낌없이 재산을 내주었다고 한다. 선생은 암울했던 일제강점기에 일본 등지로 다니면서 가다니 8단과 혼다슈고 초단에게 백을 들고 만방으로 이기는 등 프로기사가 없던 시절에 조선 바둑계의 국수로 불려졌다. 특히 며느리의 산후조리를 위해 보약을 지으러 갔다가 바둑친구를 만나 약을 든 채로 서울로 바둑 유랑을 가는 등 많은 일화를 남긴 바둑계의 전설적인 인물로 알려져 있다,

또한 이곳은 선생의 증조부 감모재(感慕齋) 노광두(盧光斗, 1771~1859)공이 만년에 낙향하여 기거한 곳으로서 공은 벼슬이 호조참판에 이르렀으나 매우 청렴하였다. 특히 이 지방에 심한 가뭄으로 흉년이 들자 임금께 조세를 감면해 주도록 상소하여 탕감을 받게 된 인근의 주민들이 그 고마움으로 재물을 갖다 주었으나 받지 않아 사랑채를 지어 주었는데 이와 같은 일은 전국적으로 찾아볼 수 없는 드문 경우 이다.

수정 국문

초고

경상남도 함양군 지곡면 개평리에 있는 고택이다.

노석규(盧錫奎)가 영조 22년(1746)에 이곳으로 이거하였으며 그의 아들 노광두(盧光斗, 1772~1859)는 호조참판 재직 시 흉년이 들어 함양·안의현의 환곡에 세금을 탕감해 줄 것을 상소하였다. 이에 순조 23년(1823) 그가 벼슬에서 물러나 낙향하자 마을의 주민들이 사랑채를 짓겠다고 청하였으나 부담을 덜어주기 위하여 초가로 건립하였다. 1830년에 노광두가 가묘를 건립하였고 1945년에 안채를 중수하였다.

구한말에서 일제강점기까지의 시기에 걸쳐 바둑계에서 활동하였던 노근영(盧近泳 1875~1945)이 태어난 곳이다. 노근영은 우리나라 최초의 국수(國手)로 전국을 돌아다니며 바둑을 두었고 집문서·논문서 등을 걸고 내기바둑을 두었다고 한다. 바둑에 지면 노참판댁 고가가 가차압되고, 이기면 가차압이 풀리기를 반복하여 27번이나 집의 등기가 바뀌었다는 일화가 전한다.

1차 수정

이 집은 풍천노씨 가문의 노석규(盧錫奎)가 개평마을로 이주한 영조 22년(1746) 무렵에 처음 지어진 것으로 추정되며, 이 마을에서 가장 오래된 집이다. 노참판댁이라 불리는 이유는 노석규의 아들인 노광두(盧光斗, 1772~1859)의 벼슬이 철종 2년(1851) 호조참판에 이르렀기 때문이다.

노광두는 호조참판을 지내던 당시 흉년이 들어 백성들의 살림이 어려워지자, 함양 지역 백성들의 세금을 탕감해달라는 상소를 올렸다. 순조 23년(1823) 그가 벼슬에서 물러나 고향으로 돌아왔을 때, 마을 주민들은 고마움의 표시로 노광두의 집에 사랑채를 짓겠다고 청하였고, 노광두는 주민들의 부담을 덜어주기 위해 초가집으로 건립하도록 하였다.

이 집은 노광두의 증손 사초 노근영(史楚 盧近泳, 1875~1945)이 태어나 자란 곳이기도 하다. 노근영은 일제강점기 바둑계의 일인자로 전국을 다니며 바둑을 두었고, 간혹 집문서를 걸고 내기바둑을 하는 바람에 27번이나 집의 등기가 바뀌었다고 한다. 그의 명성이 전국에 알려지면서 노참판댁에는 손님이 끊이지 않았고, 손님에게 대접하던 사초국수가 유명하다.

현재 이 집은 대문채, 사랑채, 안채, 사당으로 이루어져 있다. 사당은 1830년 노광두가 지었고, 안채는 1945년에 중수하였다. 초가로 지었던 사랑채도 지금은 기와지붕으로 바뀌었다.

자문의견

  1. 분야별 자문위원 1
    • 현재 이 집은 대문채, 사랑채, 안채, 사당으로 이루어져 있다. 사당은 1830년 노광두가 지었고, 안채는 마을에서 가장 오래되었다고 전해지며 1945년에 중수하였다. 초가로 지었던 사랑채는 현재 기와지붕으로 바뀌었다.
  2. 분야별 자문위원 2
  3. 읽기 쉬운 문안 자문위원
    • 이 집은 풍천노씨 가문의 노석규(盧錫奎)가 영조 22년(1746) 무렵에 이주해서 지은 개평마을에서 가장 오래된 집이다. 노참판댁이라 불리는 이유는 그의 아들인 노광두(盧光斗, 1772~1859)가 호조참판을 했기 때문이다. 노광두는 참판을 지내던 당시 흉년이 들어 백성들의 살림이 어려워지자, 함양 지역 백성들의 세금을 탕감해달라는 상소를 올려 탕감을 받게 되었다. 순조 23년(1823) 그가 벼슬에서 물러나 고향으로 돌아왔을 때, 마을 주민들은 고마움의 표시로 재물을 갖다 주었으나 받지 않았다. 대신 사랑채를 짓겠다고 청하자, 주민들의 부담을 덜어주기 위해 초가집으로 건립했다는 일화로 유명하다.
      이 곳은 노광두의 증손인 사초 노근영(史楚 盧近泳, 1875~1945)이 태어나 자란 곳이기도 하다. 일제강점기 바둑계의 일인자로, 전국을 다니며 바둑을 두었고, 간혹 집문서를 걸고 내기바둑을 하는 바람에 27번이나 집의 등기가 바뀌었다고 한다. 그의 명성이 자자해지자 손님이 끊이지 않았고, 손님을 대접하던 사초국수가 유명하다. 암울했던 일제강점기에 일본 등지로 다니면서 가다니 8단과 혼다슈고 초단에게 백을 들고 만방으로 이기는 등 프로기사가 없던 시절에 조선 바둑계의 국수로 불려졌다. 특히 며느리의 산후조리를 위해 보약을 지으러 갔다가 바둑친구를 만나 약을 든 채로 서울로 바둑 유랑을 가는 등 많은 일화를 남긴 바둑계의 전설적인 인물로 알려져 있다.
      현재 이 집은 대문채, 사랑채, 안채, 사당으로 이루어져 있다. 사당은 1830년 노광두가 지었고, 안채는 1945년에 중수하였다. 초가로 지었던 사랑채도 지금은 기와지붕으로 바뀌었다.

2차 수정

이 집은 풍천노씨 가문의 노석규(盧錫奎)가 개평마을로 이주한 영조 22년(1746) 무렵에 처음 지어진 것으로 추정되며, 이 마을에서 가장 오래된 집이다. 노참판댁이라 불리는 이유는 그의 아들인 노광두(盧光斗, 1772~1859)가 호조참판을 지냈기 때문이다.

노광두는 1814년 과거에 급제하였고, 여러 관직을 지내다 1851년 호조참판에 이르렀다. 참판으로 재직하던 당시 흉년이 들어 함양 지역 백성들의 살림이 어려워지자, 세금을 탕감해달라는 상소를 올리기도 하였다. 순조 23년(1823) 그가 벼슬에서 물러나 고향으로 돌아왔을 때, 마을 주민들은 고마움의 표시로 노광두의 집에 사랑채를 짓겠다고 청하였고, 노광두는 주민들의 부담을 덜어주기 위해 초가집으로 건립하도록 하였다.

이 집은 노광두의 증손 사초 노근영(史楚 盧近泳, 1875~1945)이 태어나 자란 곳이기도 하다. 노근영은 일제강점기 바둑계의 일인자로 전국을 다니며 바둑을 두었고, 간혹 집문서를 걸고 내기바둑을 하는 바람에 27번이나 집의 등기가 바뀌었다고 한다. 며느리의 산후조리를 위해 보약을 지으러 갔다가 바둑친구를 만나 약을 든 채로 서울로 바둑 유랑을 가는 등 많은 일화를 남긴 바둑계의 전설적인 인물로 알려져 있다. 그의 명성이 자자해지자 노참판댁에는 손님이 끊이지 않았고, 손님에게 대접하던 사초국수가 유명하다.

현재 이 집은 대문채, 사랑채, 안채, 사당으로 이루어져 있다. 사당은 1830년 노광두가 지었고, 안채는 1945년에 중수하였다. 초가로 지었던 사랑채는 지금은 기와지붕으로 바뀌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