토론:한산이씨 대산종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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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22년 국문집필

기존 국문

이 주택은 대산(大山) 이상정(李象靖, 1711~1781)이 태어난 집으로 8대손인 용원(龍遠, 1915~1959)이 17세에 결혼 한 후 3~4년 뒤에 규모를 조금 줄여 건립하였다고 한다. 이상정은 본관이 한산이며 목은 이색의 후예로 퇴계 이황의 학문적 정통을 계승하여 유림의 종사로 인정받았으며, 벼슬을 사양하고 낙향하여 많은 제자를 길러내었다.

이 집은 정면 5칸, 측면 5칸의 ‘口’자형 평면구조의 목조 기와집이다. 안채와 마주하는 방 2칸은 제례 시에 사용하는 방으로 구성하였다. 일반적으로 안채는 여성의 공간으로 사용되는데 반해 대산종가에서는 남성과 조상을 위한 공간으로 마련한 것이 특이하다.

수정 국문

초고

이 집은 조선시대의 학자 대산 이상정(大山 李象靖, 1711~1781) 가문의 종택이다. 종택은 한 집안의 대를 잇는 후손이 대대로 사는 집이다. 이상정이 태어난 집이기도 한 이 집은 8대손인 이용원(李龍遠, 1915~1959)이 결혼 후 1930년대에 규모를 줄여 지금의 모습으로 다시 건립했다고 한다.

이상정은 안동 일직면에 한산이씨 중 처음으로 정착한 입향조 이홍조(李弘祚, 1595~1660)의 현손(玄孫)이다. 그는 안동에 기반을 둔 조선시대의 저명한 유학자 이황(李滉, 1502~1570)의 학문을 계승한 학자로, 벼슬을 사양하면서 고향에서 제자를 양성하는 것에 힘썼다.

집은 대문채, 본채, 안채, 사당으로 이루어져 있다. 사랑 공간은 정면에 계자 난간을 두른 툇마루를 앞마당 쪽으로 돌출하여 시설해 대청을 대신하도록 하였으며, 다른 공간보다 높은 지붕을 얹어 공간의 위계를 나타냈다. 안채 대청 우측에 있는 온돌방 중 가장 위쪽은 이상정이 출생한 방이라 하여 ‘태실(胎室)’이라 부른다. 바로 이어지는 방은 제례 때 사용하는 빈소방으로, 일반적으로 안채가 여성의 공간으로 사용되는데 비해 남성과 조상을 위한 공간으로 마련되어 있는 점이 독특하다.

  • 담장을 두른 별도의 영역 안에 자리한 사당에는 이상정 내외의 위패와 제사를 올릴 4대조까지의 위패가 모셔져 있다.
  • 현재 숙박시설로 운영되고 있다.

1차 수정

한산이씨 대산종가는 조선시대의 학자 대산 이상정(大山 李象靖, 1711~1781) 가문의 종택이다. 종택은 한 집안의 대를 잇는 후손이 대대로 사는 집이다. 대산종가가 위치한 망호리는 17세기 중반 이상정의 4대조인 이홍조(李弘祚, 1595~1660)가 정착한 이래 한산이씨 집성촌이 되었다.

이상정은 영조 11년(1735) 과거에 급제하였으나 벼슬에는 뜻을 두지 않았고, 퇴계 이황(退溪 李滉, 1501~1570)의 학문을 계승하며 제자를 길러내는 데 힘썼다. 이상정의 제자 명부인 『고산급문록(高山及門錄)』에 이름이 오른 제자만 273명에 이른다.

지금의 대산종가는 이상정의 8대손인 이용원(李龍遠, 1915~1959)이 1930년대에 규모를 줄여 다시 지은 것이라고 한다. 중문채, 사랑채, 안채로 이루어진 ‘ㅁ’자형의 본채와 별도의 담장을 두른 사당으로 이루어져 있다. 안채의 대청 오른쪽에는 방 세 개가 연이어 있는데, 가장 안쪽에 있는 방이 이상정이 태어난 ‘태실(胎室)’이다. 나머지 방 두 개는 제례 때 사용하는 빈소이다. 일반적으로 안채는 집안의 여성들이 사용하는 공간인데, 남성과 조상을 위한 빈소가 마련되어 있는 점이 독특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