토론:학봉 신도비 및 묘방석

HeritageWiki
이동: 둘러보기, 검색

2021년 국문집필

기존 국문

이 것은 학봉(鶴峯) 김성일(金誠一)의 신도비와 묘방석으로 신도비는 묘소 50m 정도 밑에 위치해 있고, 묘방석은 묘소 바로 옆에 위치해 있다. 김성일은 류성룡(柳成龍)과 더불어 퇴계 학파를 대표하는 인물로서, 그의 학통은 장흥효(張興孝), 김흥락(金興洛)으로 이어지면서 한말까지 영남학파의 중추적 역할을 하였다.

신도비는 화강암을 거북모양으로 조각하여 만든 귀부(龜趺)에 역시 화강암의 비신을 세웠다. 비신의 크기는 높이 213cm, 너비 108cm, 두께 37cm이며 용모양의 비머리는 높이 80cm로 두 마리의 용무늬와 구름무늬를 새겼다. 비신과 용모양의 비머리는 동일한 석재로 만들어진 것이 특징이다. 묘방석은 무덤을 조성할 때 나온 큰 바위로서 흔치 않은 특이한 형태로 묘비를 대신하고 있다.

수정 국문

초고

신도비란 임금이나 벼슬이 높은 사람의 일생과 업적을 기록하여 세우는 비석으로, 대개 무덤 앞이나 무덤의 남동쪽에 세운다. 신도(神道)는 신(神)이 묘역에 이르는 길을 뜻한다.

이 신도비는 조선시대의 학자이자 문신인 학봉 김성일(鶴峯 金誠一, 1538-1593)을 기리기 위해 조선 인조 12년(1634)에 세워졌으며, 묘소 아래쪽에 있는 비각 안에 자리하고 있다.

김성일은 1568년 과거에 급제하여 여러 관직을 역임하였다. 퇴계 이황(退溪 李滉, 1501-1570)의 수제자 중 한 사람으로, 경상도 지역 유림의 중추 역할을 하였다. 1590년 사신으로 일본에 다녀온 후, 일본이 전쟁을 하지 않을 것이라고 보고하였지만, 2년 후 일본은 조선을 침략하였다. 전쟁이 일어나자 김성일은 자신의 과오를 씻기 위해 경상도 지역을 돌며 의병 활동을 독려하고 군량미 확보에 전념하는 등, 침략군과의 전쟁에 투신하였다. 진주성에서 항전하다가 병으로 죽었다.

화강암으로 만들어진 신도비는 거북 모양의 받침돌과 몸돌, 머릿돌로 이루어져 있다. 몸돌과 머릿돌은 하나의 돌을 이용했으며, 머릿돌에는 두 마리의 용과 구름이 장식되어 있다.

정경세(鄭經世, 1563-1633)가 비문을 짓고, 서예에 뛰어났던 이산해(李山海, 1539-1609)가 글씨를 썼으며, 앞면에 새겨진 비의 전액(篆額)은 김상용(金尙容, 1561-1637)의 글씨이다. 비각은 현종 5년(1664)에 세워졌다.

묘방석은 묘의 바로 옆에 두어 묘의 주인공을 밝혀두는 것이다. 김성일의 무덤 오른쪽에 세워져 있는 묘방석은 광해군 11년(1619)에 세워졌으며, 무덤을 만들기 위해 땅을 팔 때 나온 큰 바위를 그대로 이용해 글씨를 새겼다. 앞면에는 퇴계 문하에서 함께 공부했던 정구(鄭逑, 1543-1620)의 글이, 뒷면에는 이준(李埈, 1560-1635)의 글이 새겨져 있다.

  • 묘방석 전면 왼쪽에 쐐기 자국이 남아있음 – 누가 왜 언제 그랬는지 정보 확인 필요.

1차 수정

신도비란 임금이나 벼슬이 높은 사람의 일생과 업적을 기록하여 세우는 비석이고, 묘방석은 묘의 주인공을 밝히기 위해 묘의 바로 옆에 두는 석조물이다.

학봉 신도비는 조선시대의 학자이자 문신인 학봉 김성일(鶴峯 金誠一, 1538~1593)을 기리기 위해 인조 12년(1634)에 세웠다.

김성일은 퇴계 이황(退溪 李滉, 1501~1570)의 수제자로 경상도 지역 유림의 중추 역할을 하였다. 선조 23년(1590) 사신으로 일본에 다녀온 후 일본이 침입하지 않을 것이라고 보고하여 임진왜란 초에 파직되기도 하였으나 곧 사면되고 다시 경상도 초유사*에 임명되었다. 경상도 지역에서 의병을 모으고 군량미 확보에 힘썼으며, 곽재우 등 의병들을 적극적으로 지원하여 진주대첩 승리의 기반을 만들었다. 그러나 선조 26년(1593) 진주성에서 계속 항전 중에 병사했다.

화강암으로 만들어진 신도비는 거북 모양의 받침돌, 몸돌, 머릿돌로 이루어져 있다. 몸돌과 머릿돌은 하나의 돌로 만들었으며, 머릿돌에는 두 마리의 용과 구름 문양이 새겨져 있다. 비문은 정경세(鄭經世, 1563~1633)가 짓고, 서예에 뛰어났던 이산해(李山海, 1539~1609)가 글씨를 썼으며, 앞면 맨 위에 새겨진 비의 이름은 김상용(金尙容, 1561~1637)의 글씨이다. 비각은 현종 5년(1664)에 세워졌다.

김성일의 묘 오른쪽에 있는 묘방석은 광해군 11년(1619)에 세워졌다. 무덤을 만들기 위해 땅을 팔 때 나온 큰 바위를 그대로 이용해 글씨를 새겼다. 앞면에는 퇴계 문하에서 함께 공부했던 정구(鄭逑, 1543~1620)의 글이 새겨져 있다.

  • 초유사(招諭使) : 난리가 일어났을 때, 백성을 타일러 경계하는 일을 맡아 하던 임시 벼슬.