토론:하남 미사리 유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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기존 국문

미사리 유적은 한강상류가 굽어지면서 생긴 남북 3km, 동서 1km의 충적대지 위에 위치하고 있는 선사~역사시대의 유적이다. 1960년 서울대학교 김원룡 교수가 처음으로 확인한 후 1979년에 사적 제269호로 지정되었다. 1980년 한 차례 발굴조사가 이루어진 이후 1987년부터 1992년까지 다시 3차례에 걸쳐 발굴조사가 실시되어 신석기시대에서 고려시대에 이르는 다양한 문화층을 확인하고 모두 466개의 유구를 발굴조사하였다. 미사리 유적은 각 시대의 집터와 생활양식을 알 수 있는 유물이 다량으로 발견되어 서울의 암사동과 더불어 한강 하류 지역 선사문화 및 역사시대 연구의 가장 중요한 유적 중의 하나이다.

안내판을 중심으로 뒤편 좌·우측에 위치한 유적지는 매장문화재의 보존 및 관리차원에서 현재 복토된 상태임을 부언해 둔다.

수정 국문

초고

하남 미사리 유적은 한강상류가 굽어지면서 생긴 남북 3km, 동서 1km의 충적대지 위에 위치하고 있는 선사~역사시대의 유적이다. 미사리 유적은 서울의 암사동과 더불어 한강 하류 지역 선사문화 및 역사시대 연구의 가장 중요한 유적 중의 하나이다.

1960년에 유적이 처음으로 확인된 이후 1979년에 사적 제269호로 지정되었다. 1980년 한 차례 발굴조사가 이루어진 이후 1987년부터 1992년까지 다시 3차례에 걸쳐 발굴조사가 실시되어 신석기시대에서 고려시대에 이르는 다양한 문화층을 확인하고 모두 466개의 유구를 발굴조사 하였다.

신석기시대 집자리의 형태는 방형과 원형으로 약 50~80cm를 파고 바닥을 다진 후 가운데에 강돌을 깔아 장방형의 화덕(爐址)을 시설하였다. 야외용 화덕이 29개소나 확인되어 당시 이곳에서 토기를 생산하고 음식을 조리했던 것으로 보인다. 청동기시대 집자리의 형태는 장방형과 방형의 두 가지 형식으로 나휜다. 집자리 면적은 대개 65㎡에서 13.5㎡로 한 집자리에 대략 5~7명이나 11~13명 정도가 함께 기거했을 것으로 보인다. 바닥의 습기를 막기 위해 바닥과 벽을 점토로 보강하였다. 집자리 내부에 을 깔고 둘레를 돌린 석상위석식(石床圍石式) 화덕이 설치한 것이 가장 큰 특징이다.

원삼국시대의 집자리의 형태는 ‘凸’자형과 ‘呂’자형 및 원형과 방형 등이 확인되는데 한강유역의 전형적인 집자리 형태이다. 벽을 따라 온돌을 만들었고 부뚜막이 있는 아궁이와 부석식 화덕을 갖추었다. 백제시대의 집자리의 형태는 육각형, 방형, 타원형, 장방형 등이며, 부뚜막과 화덕아궁이 시설을 갖추고 있다. 경작유구, 다량의 저장시설, 범람을 방지하는 배수의 기능을 갖고 있는 도랑 등이 확인 되는 것을 볼 때 당시 미사리 지역에 농업을 기반으로 한 백제인의 대규모 취락이 존재하고 있었음을 알 수 있다.

이후로도 고려시대의 집자리와 저장공, 독무덤(甕棺墓) 등이 확인되어 삼국시대 이후에도 미사동 일대에 지속적으로 사람들이 기거하고 있었음을 알 수 있다.

1차 수정

하남 미사리 유적은 한강 상류의 충적대지에 위치하고 있는 생활유적이다. 이 유적이 처음 조사된 1960년 당시에는 신석기시대의 유적인 것으로 알려졌으나, 1987년부터 1993년까지 여러 차례에 걸친 발굴조사를 통해 신석기시대부터 백제시대까지 다양한 층위의 유적이 분포하고 있음이 밝혀졌다. 각 시기별 유적의 변천 과정이 명확하고 유구 간의 선후 관계를 밝히기에도 매우 용이하기 때문에, 한국 중부 지역 선사시대의 전반적인 사회상을 살피는 데 표준이 된다.

신석기시대의 유구로는 방형과 원형의 집터, 화덕자리 등이 발견되었고, 다양한 석기와 빗살무늬토기가 다수 발굴되었다. 화덕자리가 31기나 확인되는 것으로 보아, 당시 이곳에서 토기를 생산하고 음식을 조리했던 것으로 추정된다.

청동기시대 지층에서는 방형과 장방형의 집터, 화덕자리, 목책유구 등이 발견되었으며, 토기류, 석기류, 옥제 장신구 등이 출토되었다. 목책유구는 집터가 밀집된 지역 북쪽의 강가를 따라 분포하고 있어, 강한 바람을 막기 위해 설치한 것으로 추정된다.

백제시대의 유구는 움집, 지상가옥 집자리, 경작유구, 부뚜막 시설 등이 확인되었다. 출토된 유물로는 다양한 형태의 토기, 물고기를 잡는 데 쓰는 그물추, 철제 화살촉, 장신구, 유리구슬을 만드는 데 쓰는 거푸집, 1세기 무렵의 것으로 보이는 청동거울 등이 있다. 특히 미사리에서 발견된 백제시대의 대규모 경작지는 국내에서 처음 조사된 백제시대의 밭 유구이다. 당시 미사리 지역에 농업을 기반으로 한 백제인의 대규모 취락이 존재하고 있었으며, 백제 초기의 왕도로 여겨지는 풍납토성과 몽촌토성의 생산기지 역할을 했던 것으로 보인다.

자문의견

  1. 분야별 자문위원 1
    • 백제시대라는 표현은 어색함->삼국시대로 표현하는 것이 적절함. 구체적인 나라를 표현하려면 삼국시대(백제)로 쓰는 것이 좋겠음
    • 미사리 한양대 A-1호 주거지에서 출토된 거울은 방제경(倣製鏡)으로 연대도 후한 만기~삼국시대 초로 추정되고 있음. ‘1세기 무렵의 것으로 보이는 청동거울 등이 있다.’->‘한경(漢鏡)을 본 뜬 거울 등이 있다. ’
  2. 분야별 자문위원 2
    • “목책유구는 집터가 밀집된 지역 북쪽의 강가를 따라 분포하고 있어, 강한 바람을 막기 위해 설치한 것으로 추정된다.”-> “목책유구는 집터가 밀집된 지역 북쪽의 강가를 따라 분포하고 있는데, 외적 또는 짐승의 침입을 막거나 강 쪽에서 불어 오는 강한 바람을 막기 위해 설치한 것으로 추정된다.”
    • “1세기 무렵의 것으로 보이는 청동거울 등이 있다.”-> “중국 한나라 때의 거울을 본 따서 만든 청동거울 등이 있다.”
  3. 읽기 쉬운 문안 자문위원
    • 하남 미사리 유적은 한강 상류의 충적대지에 위치하고 있는 생활유적이다. 이 유적이 처음 조사된 1960년 당시에는 신석기시대의 유적인 것으로 알려졌으나, 1987년부터 1993년까지 여러 차례에 걸친 발굴조사를 통해 신석기시대부터 백제시대까지 다양한 층위의 유적이 분포하고 있음이 밝혀졌다. 각 시기별(시기별이 맞는 표현임) 유적의 변천 과정이 명확하고 유구 간의 선후 관계를 밝히기에도 매우 용이하기 때문에, 한국 중부 지역 선사시대의 전반적인 사회상을 살피는 데 표준이 된다.
      신석기시대의 유구(구조와 양식을 알 수 있는 실마리가 되는 자취)로는 방형과 원형의 집터, 화덕자리 등이 발견되었다. 다양한 석기와 빗살무늬토기도 다수 발굴되었다. 화덕자리가 31기나 확인되는 것으로 보아, 당시 이곳에서 토기를 생산하고 음식을 조리했던 것으로 추정된다.
      청동기시대 지층에서는 방형과 장방형의 집터, 화덕자리, 목책유구 등이 발견되었다. 토기류, 석기류, 옥제 장신구 등도 출토되었다. 목책유구는 집터가 밀집된 지역 북쪽의 강가를따라 분포하고 있어, 강한 바람을 막기 위해 설치한 것으로 추정된다.
      백제시대의 유구는 움집, 지상가옥 집자리, 경작유구, 부뚜막 시설 등이 확인되었다. 출토된유물로는 다양한 형태의 토기, 물고기를 잡는 데 쓰는 그물추, 철제 화살촉, 장신구, 유리구슬을 만드는 데 쓰는 거푸집, 1세기 무렵의 것으로 보이는 청동거울 등이 있다. 특히 미사리에서 발견된 백제시대의 대규모 경작지는 국내에서 처음 조사된 백제시대의 밭 유구이다.
      당시 미사리 지역에 농업을 기반으로 한 백제인의 대규모 취락이 존재하고 있었으며, 백제초기의 왕도로 여겨지는 풍납토성과 몽촌토성의 생산기지 역할을 했던 것으로 보인다.

2차 수정

하남 미사리 유적은 한강 상류의 충적대지에 위치하고 있는 생활유적이다. 이 유적이 처음 조사된 1960년 당시에는 신석기시대의 유적인 것으로 알려졌으나, 1987년부터 1993년까지 여러 차례에 걸친 발굴조사를 통해 신석기시대부터 삼국시대까지 다양한 층위의 유적이 분포하고 있음이 밝혀졌다. 각 시기별 유적의 변천 과정이 명확하고 유구 간의 선후 관계를 밝히기에도 매우 용이하기 때문에, 한국 중부 지역 선사시대의 전반적인 사회상을 살피는 데 표준이 된다.

신석기시대의 유구로는 방형과 원형의 집터, 화덕자리 등이 발견되었고, 다양한 석기와 빗살무늬토기가 다수 발굴되었다. 화덕자리가 31기나 확인되는 것으로 보아, 당시 이곳에서 토기를 생산하고 음식을 조리했던 것으로 추정된다.

청동기시대 지층에서는 방형과 장방형의 집터, 화덕자리, 목책유구 등이 발견되었으며, 토기류, 석기류, 옥제 장신구 등이 출토되었다. 목책유구는 집터가 밀집된 지역 북쪽의 강가를 따라 분포하고 있는데, 외적 또는 짐승의 침입을 막거나 강 쪽에서 불어오는 강한 바람을 막기 위해 설치한 것으로 추정된다.

삼국시대의 유구는 백제 때 지어진 움집, 지상가옥 집자리, 경작유구, 부뚜막 시설 등이 확인되었다. 출토된 유물로는 다양한 형태의 토기, 물고기를 잡는 데 쓰는 그물추, 철제 화살촉, 장신구, 유리구슬을 만드는 데 쓰는 거푸집, 중국 한나라 때의 거울을 본떠 만든 청동거울 등이 있다. 특히 미사리에서 발견된 대규모 경작지는 국내에서 처음 조사된 백제의 밭 유구이다. 당시 미사리 지역에 농업을 기반으로 한 백제인의 대규모 취락이 존재하고 있었으며, 백제 초기의 왕도로 여겨지는 풍납토성과 몽촌토성의 생산기지 역할을 했던 것으로 보인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