토론:충현서원 유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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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21 안내문안 초안 작성 지원 사업

기존 국문

충현서원은 충청남도에 최초로 세워진 사액서원이다. 선조 14년(1581) 학자인 고청 서기(孤靑 徐起) 선생이 주자의 영정을 모시고 창건하였으며, 인조 2년(1624)에 충현이라는 현판을 하사[사액]받았다.

유적에는 충현서원[문화재자료 제60호], 충현서원사적비, 충현서원사실, 우암송선생추향기 등이 있다.

사당에는 주자영정을 중앙에 모셨고 좌우에 성현 8분의 위패를 모시고 있으며, 해마다 음력 3월과 9월 중정일에 제향을 지내고 있다.

수정 국문

초고

서원은 조선시대에 세워진 사립 교육기관으로, 선현 제향과 교육의 기능을 수행하였다.

충현서원은 충청남도에서 가장 먼저 세워진 서원으로, 서기(徐起, 1523-1591)가 주자의 영정을 모시고 그를 추모하기 위해 건립한 서원이다. 서기는 충청남도 홍성에서 태어나 한때 불교에 심취하기도 하였으나, 서경덕(徐敬德, 1489-1546)과 이지함(李之菡, 1517-1578) 등에게 성리학을 배우고 학문적 깨달음을 얻었다. 특히 이지함과는 전국 각지를 유랑하며 학문을 연구하기도 했다. 만년에는 공주 공암에 정착하여 19년을 보내면서 많은 후학을 양성하였다.

이 서원은 본래 서기가 1574년부터 제자들을 가르치던 서당 건물로 박약재(博約齋)라는 명칭을 사용하였다. 1581년(선조 14) 서기는 직접 중국의 남경에 가서 주자의 영정을 모셔왔으며 제자들과 함께 서원 건립을 추진하였고, 당시 공주목사였던 권문해(權文海, 1534-1591)의 적극적인 재정 지원도 받았다. 창설 당시에는 공암서원(孔巖書院)이라는 명칭이었는데, 주자를 중앙에 모시고 공주 지역의 현인으로 이존오(李存吾, 1341-1371), 이목(李穆, 1471-1498), 성제원(成悌元, 1504-1559)을 제향하였다. 한편 공암서원은 서기가 죽은 다음해 임진왜란이 일어나면서 폐허가 되었으나, 1610년(광해군 2)에 서기의 문인이자 공주의 사족들에 의해 중수되었다.

1624년(인조 2)에는 임진왜란의 의병장이자 공주목사를 지낸 조헌(趙憲, 1544-1592)을 추가로 제향하였고, 이듬해 ‘충현(忠賢)’이라는 사액을 받게 되었다.

그 뒤 김장생(金長生, 1548-1631), 송준길(宋浚吉, 1606-1672), 송시열(宋時烈, 1607-1689) 등 노론의 대신들을 추가로 제향하였으나, 서원의 창설자인 서기만은 온전히 제향하지 못하고 별도로 제향하였다. 1871년(고종 8)에는 대원군의 서원철폐령으로 훼철된 뒤 서원 터에 단을 세워 제사를 지냈다. 1925년에는 옛 터에 사당을 중건하고 주자와 7명의 현인 외에 서기까지 모두 9위를 함께 제향하였다. 1976년에 사당을 복원하였고, 현재는 사당과 신문(神門), 강당, 수직사가 남아 있다.

사당 앞에는 ‘충현서원사적비(忠賢書院事蹟碑)’와 ‘충현서원사실우암송선생추향기(忠賢書院事實尤庵宋先生追享記)’가 서있고, 사적비 앞에 하마비(下馬碑)가 있다. 그리고 서원에는 유생들의 명단인 《청아록(菁莪錄)》, 유생들의 방명록인 《심원록(尋院錄)》, 서원의 경제적인 기반을 보여주는 《서원위토수도기(書院位土收賭記)》 등이 소장되어 전해지고 있다.

충현서원은 조선시대 충청우도를 대표하는 서원으로서 해마다 음력 3월과 9월 중정일에 제향을 지내고 있다.

1차 수정

서원은 조선시대 사립 교육기관으로 선현 제향과 교육의 기능을 수행했다.

충현서원은 충청남도에서 가장 먼저 세워진 서원으로, 서기(徐起, 1523~1591)가 주자의 영정을 모시고 그를 추모하기 위해 건립하였다. 서기는 충청남도 홍성에서 태어나 한때 불교에 심취하기도 하였으나, 서경덕(徐敬德, 1489-1546)과 이지함(李之菡, 1517-1578) 등에게 성리학을 배우고 학문적 깨달음을 얻었다. 특히 이지함과는 전국 각지를 유랑하며 학문을 연구하기도 했다. 만년에는 공주 공암에 정착하여 19년을 보내면서 많은 후학을 양성하였다.

이 서원은 본래 서기가 1574년부터 제자들을 가르치던 서당 건물로 박약재(博約齋)라는 명칭을 사용하였다. 선조 14년(1581) 서기는 직접 중국의 남경에 가서 주자의 영정을 모셔왔으며 제자들과 함께 서원 건립을 추진하였고, 당시 공주목사였던 권문해(權文海, 1534~1591)의 적극적인 재정 지원도 받았다. 창설 당시에는 공암서원(孔巖書院)이라는 명칭이었는데, 주자를 중앙에 모시고 공주 지역의 현인으로 이존오(李存吾, 1341~1371), 이목(李穆, 1471~1498), 성제원(成悌元, 1504~1559)을 제향하였다. 한편 공암서원은 임진왜란으로 인해 폐허가 되었다가, 광해군 2년(1610)에 서기의 문인이자 공주의 사족들에 의해 중수되었다.

인조 2년(1624)에는 임진왜란의 의병장이자 공주목사를 지낸 조헌(趙憲, 1544~1592)을 추가로 제향하였고, 이듬해 ‘충현(忠賢)’이라는 사액을 받게 되었다. 그 뒤 김장생(金長生, 1548-1631), 송준길(宋浚吉, 1606-1672), 송시열(宋時烈, 1607-1689) 등 노론의 대신들을 추가로 제향하였으나, 서원의 창설자인 서기만은 온전히 제향하지 못하고 별도로 제향하였다. 고종 8년(1871)에는 대원군의 서원철폐령으로 훼철된 뒤 서원 터에 단을 세워 제사를 지냈다. 1925년에는 옛 터에 사당을 중건하고 제향을 이어가다가, 1976년에 사당을 복원하고, 현재는 사당과 신문(神門), 강당, 수직사가 남아있다.

사당 앞에는 ‘충현서원사적비(忠賢書院事蹟碑)’와 ‘충현서원사실우암송선생추향기(忠賢書院事實尤庵宋先生追享記)’가 있고, 사적비 앞에 하마비(下馬碑)가 있다. 그리고 서원에는 유생들의 명단인 『청아록(菁莪錄)』, 유생들의 방명록인 『심원록(尋院錄)』, 서원의 경제적인 기반을 보여주는 『서원위토수도기(書院位土收賭記)』 등이 소장되어 전해지고 있다.

자문의견

  1. 분야별 자문위원 1
    • 충현서원은 조선 중기의 사립 교육기관으로 선현 제향과 교육의 기능을 수행한 역사적인 장소이다.
      충현서원은 충청남도에서 가장 먼저 세워진 사액 서원으로, <이하 내용 동일하므로 중략> 고종 8년(1871)에는 대원군의 서원철폐령으로 훼철된 뒤 서원 터에 단을 세워 제사를 지냈다. 이 때 주자의 영정은 공주향교 존경각에 봉안되었다. 1925년에는 옛 터에 사당을 중건하고 제향을 이어가다가, 1976년에 서원사당을 복원하고, 현재는 사당과 신문(神門), 강당, 수직사가 남아 있다. 서원의 건물은 전면에 강당을 사당과 직각 방향으로 배치하고 후면에 신문을 두고 사당을 배치한 ‘전학후묘’식 서원이다. <이하 내용 동일>
  2. 분야별 자문위원 2
    • 선조 14년(1581) 서기는 직접 중국의 남경에 가서 주자의 영정을 모셔왔으며 제자들과 함께 서원 건립을 추진하였고, 당시 공주목사였던 권문해(權文海, 1534~1591)의 적극적인 재정 지원도 받았다. -> 선조 14년(1581) 서기는 제자들과 함께 서원 건립을 추진하였고, 당시 공주목사였던 권문해(權文海, 1534~1591)의 적극적인 재정 지원도 받았다. 서기는 직접 중국 남경에 가서 주자의 영정을 모셔와 배향하였는데, 이는 최초의 주자 배향이었다.
    • 기존 안내문에는 “인조 2년(1624)에 충현이라는 현판을 사액받았다.”라고 되어 있는데 『공주의 문화유산 1: 도지정문화재 및 향토문화유적』 및 문화재청 기사, 향문 기사들을 종합해 보면 1624년에는 조헌의 추가 배향을 건의하였고, 이듬해에 사액을 받은 것으로 보임. 시기 확인 필요.
  3. 읽기 쉬운 문안 자문위원
    • 지나치게 많은 정보가 나열되어 있습니다. 사람 이름도 많고 복잡해 가독성이 크게 떨어짐. 이 서원의 특징만 부각 시키는 게 좋을 듯.
    • 제향이라는 말이 계속 쓰이는데 지나치게 반복이 심하며, 요즘은 쓰지 않는 말이라 너무 어려움.

2차 수정

서원은 조선시대 사립 교육기관으로 선현 제향과 교육의 기능을 수행했다.

충현서원은 충청남도에서 가장 먼저 세워진 서원으로, 서기(徐起, 1523~1591)가 주자의 영정을 모시고 그를 추모하기 위해 건립하였다. 서기는 충청남도 홍성에서 태어나 한때 불교에 심취하기도 하였으나, 서경덕(徐敬德, 1489-1546)과 이지함(李之菡, 1517-1578) 등에게 성리학을 배우고 학문적 깨달음을 얻었다. 특히 이지함과는 전국 각지를 유랑하며 학문을 연구하기도 했다. 만년에는 공주 공암에 정착하여 19년을 보내면서 많은 후학을 양성하였다.

이 서원은 본래 서기가 1574년부터 제자들을 가르치던 서당 건물로 박약재(博約齋)라는 명칭을 사용하였다. 선조 14년(1581) 서기는 직접 중국의 남경에 가서 주자의 영정을 모셔왔으며 제자들과 함께 서원 건립을 추진하였고, 당시 공주목사였던 권문해(權文海, 1534~1591)의 적극적인 재정 지원도 받았다. 창설 당시에는 공암서원(孔巖書院)이라는 명칭이었는데, 주자를 중앙에 모시고 공주 지역의 현인으로 이존오(李存吾, 1341~1371), 이목(李穆, 1471~1498), 성제원(成悌元, 1504~1559)을 제향하였다. 한편 공암서원은 임진왜란으로 인해 폐허가 되었다가, 광해군 2년(1610)에 서기의 문인이자 공주의 사족에 의해 중수되었다.

인조 2년(1624)에는 임진왜란의 의병장이자 공주목사를 지낸 조헌(趙憲, 1544~1592)을 추가로 제향하였고, 이듬해 ‘충현(忠賢)’이라는 사액을 받게 되었다. 그 뒤 김장생(金長生, 1548~1631), 송준길(宋浚吉, 1606~1672), 송시열(宋時烈, 1607~1689) 등 노론의 대신을 추가로 제향하였으나, 서원의 창설자인 서기만은 온전히 제향하지 못하고 별도로 제향하였다. 고종 8년(1871)에는 대원군의 서원철폐령으로 훼철된 뒤 서원 터에 단을 세워 제사를 지냈다. 이 때 주자의 영정은 공주향교 존경각에 봉안되었다. 1925년에는 옛터에 사당을 중건하고 제향을 이어가다가, 1976년에 사당을 복원하고, 현재는 사당과 신문(神門), 강당, 수직사가 남아 있다.

사당 앞에는 ‘충현서원사적비(忠賢書院事蹟碑)’와 ‘충현서원사실우암송선생추향기(忠賢書院事實尤庵宋先生追享記)’가 있고, 사적비 앞에 하마비(下馬碑)가 있다. 그리고 서원에는 유생들의 명단인 『청아록(菁莪錄)』, 유생들의 방명록인 『심원록(尋院錄)』, 서원의 경제적인 기반을 보여주는 『서원위토수도기(書院位土收賭記)』 등이 소장되어 전해지고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