토론:지산서당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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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21년 국문집필

기존 국문

이 서당은 조선 숙종(肅宗) 때 대사헌을 지낸 지촌(芝村) 김방걸(金邦杰)의 덕을 추모하기 위하여 정조(正祖) 28년(1800)에 후손 및 지방사림의 발의로 건립되었다. 고종(高宗) 때 대원군(大院君)의 서원철폐령에 의해 철거되었다가 1926년 복원되었고, 1988년 임하댐 건설로 인하여 임동면 망천리에서 현재의 위치로 옮겨졌다.

이 건물은 남서향이며 정면 5칸, 측면 2칸 반의 앞 뒤칸을 둔 중당협실형이다. 중앙 마루방을 중심으로 좌․우 퇴칸에 온돌방이 배치되고 4면에 퇴[퇴칸]를 두었다. 그리고 마루 전면에 사분합들문을 달아 폐쇄된 마루방을 만들고 방과 마루 사이의 공간을 넓게 쓸 수 있도록 하였다. 기둥 위에 이익공(二翼工) 양식을 취하고 있으며 일제강점기에 복원된 건축물로서 수법이 매우 치밀하고 짜임새가 있다.

수정 국문

초고

이곳은 조선시대의 문신인 지촌 김방걸(芝村 金邦傑, 1623~1695)의 덕을 기리기 위해 세운 서당이다. 김방걸은 안동 지례마을의 의성김씨 입향조로, 조선 현종(顯宗) 1년(1660) 과거에 급제해 여러 벼슬을 지냈다. 그는 벼슬에서 물러난 후 고향으로 돌아와 서당을 세우고 후학 양성에 힘썼다.

지산서당은 김방걸의 후손들과 지역 선비들의 발의로 정조 24년(1800)에 지어졌으며, 흥선대원군(興宣大院君, 1820~1898)의 서원철폐령으로 인해 헐렸다가 1926년에 복원되었다.

건물은 중앙의 마루방을 중심으로 좌우에 온돌방을 배치하였다. 건물의 네 면 전체에 통행의 편의를 위해 쪽마루를 둘렀으며, 마루방에는 들어 올릴 수 있는 분합문을 달아 필요에 따라 공간을 활용할 수 있도록 하였다.

원래 안동군 임동면 망천리에 있었으나 임하댐 건설로 인해 1988년 지금의 자리로 옮겨왔다. 왼쪽 담장 너머에 있는 지촌제청(芝村祭廳, 경상북도 유형문화재 제505호)·지촌종택(芝村宗宅, 경상북도 민속문화재 제187호)과 함께 ‘지례예술촌’을 구성하고 있다.

  • 몇 년에 훼철되었는지는 확인할 수 없었음.
  • 국내 서당건물 중 가장 규모가 크다고 하며, 현재 숙박 공간으로 이용되고 있음.
  • 여러 설명에 김방걸이 지산서당을 세웠다고 언급되어 있지만, 김방걸이 세운 지산서당과 1800년에 세웠다고 하는 이 지산서당이 같은 곳인지 확인되지 않으므로 해당 내용은 최대한 배재함.

1차 수정

지산서당은 조선시대의 문신인 지촌 김방걸(芝村 金邦傑, 1623~1695)의 덕을 기리기 위해 정조 24년(1800)에 세운 서당이다.

김방걸은 천전리에 세거하는 의성김씨 대조(大祖) 청계 김진(靑溪 金璡, 1500~1580)의 4세손으로, 현종 1년(1660) 과거에 급제해 여러 벼슬을 지냈다. 분가하면서 낙동강 지류인 반변천 상류 지례에 정착하였고 이후 그의 후손들이 대대로 지례마을에 살게 되었다.

지산서당은 19세기 말 서원철폐령으로 헐렸다가 1926년에 복원되었다. 원래 임동면 망천리에 있었으나 임하댐이 건설되면서 1988년 원래 마을 자리의 뒷산인 지금 위치로 옮겨왔다. 왼쪽 담장 너머에 있는 지촌제청(경상북도 유형문화재 제505호), 지촌종택(경상북도 민속문화재 제187호) 등과 함께 지례예술촌을 이루고 있다.

건물은 마루방을 중심으로 좌우에 온돌방을 배치하였다. 통행의 편의를 위해 네 면에 쪽마루를 둘렀으며, 마루방에는 들어 올릴 수 있는 분합문을 달아 필요에 따라 공간을 넓게 쓸 수 있도록 하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