토론:조식 남명문집 목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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기존 국문

이 책판은 남명(南冥) 조식(曺植, 1501~1572)의 시문집(詩文集)의 제작을 위해 제작한 목판(木板)이다. 선생의 문집은 몇가지 사유로 인하여 여러 차례 변천을 겪었는데, 크게 세 가지 경우로 나누어 볼 수 있다. 먼저 인조반정(仁祖反正) 이전에 간행된 초기본인 갑진본(甲辰本) 계통이 있고, 이후 처음 간행을 주도하였던 정인홍(鄭仁弘)과 관련된 내용을 삭제하고 체제에 다소 변화를 가져온 이정본(釐正本)계통이 있으며, 고종 연간에 문집의 내용을 대폭적으로 수정한 중간본(重刊本) 계통이 있다. 문집은 처음 1602년(선조 35) 해인사에서 간행하였으나 판각이 불에 타 1604년(선조 37)에 다시 간행하여 배포하였으며, 이후 이정본에서는 편년(編年) 등의 내용 추가되고 「학기유편」 (學記類編)과 「산해사우연원록」 (山海師友淵源錄)까지 포함한 이정합집본(釐正合集本)이 간행되도록 하였다. 현재의 목판은 중간본 계통의 최후 간행본으로 185매로 된 6책의 완전한 분량이 보존되어 있다. 선생의 문집은 선생의 학문의 맥과 깊이를 전해주고 있을 뿐만 아니라, 지역에 관한 다양한 역사적 사실들을 전하고 있어 남명학 연구는 물론 지역사 연구에도 좋은 자료로 활용되고 있다.

수정 국문

초고

이 목판은 조선시대 학자인 조식(曺植, 1501∼1572)의 문집을 간행하기 위해 만든 목판이다. 1604년(선조 37)에 제자인 정인홍(鄭仁弘, 1535~1623)에 의해 해인사(海印寺)에서 간행되었으나, 불에 타버려 1622년(광해군 14)에 관찰사 유영순(柳永詢, 1552~?)의 도움으로 다시 간행하였다. 이후 1764년(영조 40)에도 박영신이 별집의 내용을 다시 교정하고 보각(補刻)하였다. 이처럼 여러 번의 간행으로 오류가 생기자 1894년(고종 31)에 기존의 문집 내용을 보완하고 수정하여 새로 간행하였고, 1897년(광무 1)에 『연보(年譜)』를 수정, 보완하여 지금의 모습을 갖추었다. 목판은 185매이며 산천재(山天齋)에 보존하고 있다.

조식은 조선시대를 대표하는 처사(處士)형 학자로 여러차례 벼슬에 임명되었지만 관직에 나아가지 않고, 평생을 학문 연구와 후진 양성에 힘썼다. 1561년(명종 16)에 지리산 기슭 지금의 산청군 시천면(矢川面)으로 이거하여 산천재를 지어 죽을 때까지 그곳에 머물며 강학(講學)에 힘썼다. 조식은 일상생활에서 철저한 절제로 일관하여 불의와 타협하지 않았으며, 당시의 사회현실과 정치적 모순에 대해서는 적극적인 비판의 자세를 견지하였다. 그가 죽은 뒤 1576년(선조 9)에 그의 제자들이 산천재 부근에 조식의 학덕을 추모하기 위해 덕천서원(德川書院), 1578년에는 김해에 신산서원(新山書院) 등을 세웠다. 시호는 문정(文貞)이고 영의정에 추증되었다.

1차 수정

이 목판은 조선시대의 학자인 남명 조식(南冥 曺植, 1501~1572)의 문집을 간행하기 위해 만든 목판이다. 선조 37년(1604) 조식의 제자인 정인홍(鄭仁弘, 1535~1623)이 합천 해인사에서 만들었으나, 불에 타버려 광해군 14년(1622) 관찰사 유영순(柳永詢, 1552~?)의 도움으로 다시 간행하였다. 이후 영조 40년(1764)에도 별집의 내용을 다시 교정하고 보각(補刻)하였다. 이처럼 목판이 여러 번의 간행되면서 오류가 생기자 고종 31년(1894) 기존의 문집 내용을 보완하고 수정하여 새로 간행하였고, 1897년에 『연보(年譜)』를 수정, 보완하여 지금의 모습을 갖추었다. 목판은 185매이며, 조식이 제자들을 가르치던 강학당인 산천재에 보관하고 있다.

조식은 조선시대를 대표하는 학자 중 하나이다. 평생 관직에 나아가지 않고 학문에만 정진하였고, 명종 16년(1561) 지금의 산청군 시천면으로 이거하여 산천재를 짓고 후학 양성에 힘썼다. 일상생활에서 철저한 절제로 일관하여 불의와 타협하지 않았으며, 당시의 사회현실과 정치적 모순에 대해서는 적극적인 비판의 자세를 견지하였다. 광해군 7년(1615) 영의정에 추증되었으며, 조식의 학덕을 추모하기 위해 선조 9년(1576) 산청군 원리에 덕천서원(德川書院)이, 선조 11년(1578)에는 김해에 신산서원(新山書院) 등이 세워졌다.

자문의견

  1. 분야별 자문위원 1
    • “이 목판은 ~위해 만든 목판이다.”→ “이 목판은 ~위해 만들었다.”
    • “다시 간행하였다.”→ 간행은 책 형태로 만들어 인출하는 것까지 포함하므로 정확한 표현이 아님. “다시 새겼다”, “다시 만들었다” 등으로 고치는 것이 좋겠음.
    • 두 번째 문단인 “조식은~등이 세워졌다.”→ 이 문장은 필요 이상의 정보를 담고 있으므로, “평생 관직에 나아가지 않고 학문에만 정진하며 후학 양성에 힘썼다. 사회현실과 정치적 모순에 대해 적극적인 비판의 자세를 견지하였다.” 정도로 축약하여 안내문 첫 줄 뒤, “선조 37년(1604) 조식의 제자인~” 앞에 배치하는 것이 좋겠다.
  2. 분야별 자문위원 2
    • 이 목판은 조선시대의 학자인 남명 조식(南冥 曺植, 1501~1572)의 문집을 간행하기 위해 만든 목판이다. 선조 37년(1604) 조식의 제자인 정인홍(鄭仁弘, 1535~1623)이 합천 해인사에서 만들었으나, 불에 타버려 광해군 14년(1622) 관찰사 유영순(柳永詢, 1552~?)의 도움으로 다시 간행하였다. 이후 영조 40년(1764)에도 별집의 내용을 다시 교정하고 보각(補刻)하였다. 이처럼 목판이 여러 번의 간행되면서 오류가 생기자 고종 31년(1894) 기존의 문집 내용을 보완하고 수정하여 새로 간행하였고, 고종 34년(1897)에 선생의 『연보(年譜)』를 수정, 보완하여 지금의 모습을 갖추었다. 목판은 185매이며, 조식이 제자들을 가르치던 강학당인 산천재에 보관하고 있다.
      조식은 조선시대를 대표하는 학자 중 하나이다. 평생 관직에 나아가지 않고 학문에만 정진하였고, 명종 16년(1561) 지금의 산청군 시천면으로 이거하여 산천재를 짓고 후학 양성에 힘썼다. 일상생활에서 철저한 절제로 일관하여 불의와 타협하지 않았으며, 당시의 사회현실과 정치적 모순에 대해서는 적극적인 비판의 자세를 견지하였다. 광해군 7년(1615) 영의정에 추증되었으며, 조식의 학덕을 추모하기 위해 선조 9년(1576) 산청군 원리에 덕천서원(德川書院)이, 선조 11년(1578)에는 김해에 신산서원(新山書院) 등이 세워졌다.
    • 1897년 연도는 고종 34년(1897)로 하는 것이 좋을 듯하다.
  3. 읽기 쉬운 문안 자문위원
    • 이 목판은 조선시대의 학자인 남명 조식(南冥 曺植, 1501~1572)의 문집을 간행하기 위해 만들었다. 선조 37년(1604) 조식의 제자인 정인홍(鄭仁弘, 1535~1623)이 합천 해인사에서 만들었지만, 원판이 불에 타버려 광해군 14년(1622) 관찰사 유영순(柳永詢, 1552~?)의 도움으로 다시 간행하였다. 이후 영조 40년(1764)에도 별집의 내용을 다시 교정하고 보각(補刻)하였다. 이처럼 목판이 여러 번의 간행되면서 오류가 생기자 고종 31년(1894) 기존의 문집 내용을 보완하고 수정하여 새로 간행하였고, 1897년에 『연보(年譜)』를 수정, 보완하여 지금의 모습을 갖추었다. 목판은 185매이며, 조식이 제자들을 가르치던 강학당인 산천재에 보관하고 있다.
      조식은 조선시대를 대표하는 학자 중 하나이다. 평생 관직에 나아가지 않고 학문에만 정진하였고, 명종 16년(1561) 지금의 산청군 시천면으로 이거하여 산천재를 짓고 후학 양성에 힘썼다. 일상생활에서 철저한 절제로 일관하여 불의와 타협하지 않았으며, 당시의 사회현실과 정치적 모순에 대해서는 적극적인 비판의 자세를 견지하였다. 광해군 7년(1615) 영의정에 추증되었으며, 조식의 학덕을 추모하기 위해 선조 9년(1576) 산청군 원리에 덕천서원(德川書院)이, 선조 11년(1578)에는 김해에 신산서원(新山書院) 등이 세워졌다.

2차 수정

이 목판은 조선시대의 학자인 남명 조식(南冥 曺植, 1501~1572)의 문집을 간행하기 위해 만들었다. 선조 37년(1604) 조식의 제자인 정인홍(鄭仁弘, 1535~1623)이 합천 해인사에서 만들었으나, 원판이 불에 타버려 광해군 14년(1622) 관찰사 유영순(柳永詢, 1552~?)의 도움으로 다시 새겼다. 이후 영조 40년(1764)에도 별집의 내용을 다시 교정하고 보각(補刻)하였다. 이처럼 목판이 여러 번의 간행되면서 오류가 생기자 고종 31년(1894) 기존의 문집 내용을 보완하고 수정하여 새로 간행하였고, 고종 34년(1897)에 『연보(年譜)』를 수정, 보완하여 지금의 모습을 갖추었다. 목판은 185매이며, 조식이 제자들을 가르치던 강학당인 산천재에 보관하고 있다.

조식은 조선시대를 대표하는 학자 중 하나이다. 평생 관직에 나아가지 않고 학문에만 정진하며 후학 양성에 힘썼다. 일상생활에서 철저한 절제로 일관하여 불의와 타협하지 않았으며, 당시의 사회현실과 정치적 모순에 대해서는 적극적인 비판의 자세를 견지하였다. 광해군 7년(1615) 영의정에 추증되었으며, 조식의 학덕을 추모하기 위해 선조 9년(1576) 산청군 원리에 덕천서원(德川書院)이, 선조 11년(1578)에는 김해에 신산서원(新山書院) 등이 세워졌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