토론:유몽인 위성공신교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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기존 국문

이 위성공신은 광해군의 폐위로 폐삭(廢削)된 공신호이기는 하나, 전존(傳存) 수량이 7점으로 극히 드물고, 조선조 공신 연구 및 임란사 연구에 매우 중요한 자료인 동시에 유몽인(柳夢寅)의 전기 자료로서도 가치가 크다.

유몽인은 조선 중기의 문신·외교가이자 서예가이다. 자는 응문(應文), 호는 어우당(於于堂)·간재(艮齋)·묵호자(默好子)이며, 본관은 고흥(高興)이다. 조부는 사간 유충관(柳忠寬), 부친은 진사 유탱(柳樘)이다.

한성부좌윤 · 대사간 등을 지냈으나 1623년 인조반정 후 그해 7월 유응형(柳應浻)이 "유몽인이 광해군의 복위음모를 꾸민다."라고 무고하여 아들 유약(柳瀹)과 함께 사형되었다. 이때 관작의 추탈은 물론 임진왜란 때 세운 공으로 봉해진 영양군(瀛陽君)의 봉호도 삭탈 당하였다. 정조 때 신원 되고 이조판서에 추증되었다.

공신교서는 조선 개국 이래 태조 1년(1392)의 개국공신을 비롯하여 공신책봉(功臣冊封)의 마지막인 영조 4년(1728) 분무공신(奮武功臣)에 이르기까지 약 340년간에 총 28회의 공신이 책록 되었다. 그 중에 1545년(명종 즉위) 대윤(大尹)을 제거하고 명종의 즉 위에 공을 세운 위사공신(衛社功臣)은 위훈(僞勳)이라 하여 폐삭(廢削) 되고, 광해군 때 책록 된 위성공신(衛聖功臣)ㆍ익사(翼社)공신ㆍ정운(定運)공신ㆍ형란(亨難)공신 등 4개 공신호는 인조반정으로 광해군이 폐출(廢黜)되면서 폐삭 되었고, 1722년 목호룡(睦虎龍)의 고변으로 일어난 신임사화(辛壬士禍)의 부사공신(扶社功臣)호는 영조 즉위로 폐삭 되고 28개 공신 중에 남아 있는 것은 22개 공신호이다.

이 문서는 1613(광해군 5년, 만력 41) 3월에, 국왕이 임진왜란 때 광해군 분조(分朝)에 호종(扈從)한 위성공신(衛聖功臣) 3등인 영양군(瀛陽君) 류몽인(柳夢寅)에게 내린 공신녹훈교서(功臣錄勳敎書)이다. 3등 공신에게는 상으로 초상화를 그려 후세에 길이 남기고 관직은 1계(階)를 올리고 부모, 처자에게도 1계를 올려주고 자식이 없을 경우 조카나 사위는 계를 올려주고 적장자는 세습하여 녹을 잃지 않게 하고 반당(伴倘) 6명, 노비 3명, 구사(丘史) 3명, 밭 20결, 은자 5냥, 비단 1필, 내구마(內俓馬) 1필을 수령토록 하였다.

수정 국문

초고

이 문서는 1613년(광해군 5)에 유몽인(柳夢寅, 1559~1623)에게 내린 위성공신교서이다. 위성공신은 임진왜란 때 왕세자인 광해군을 뒤따른 공이 있는 신하에게 내린 공신호(功臣號)이다. 교서는 국왕이 내리는 명령서(命令書)로 황제가 내리는 문서는 따로 조서(詔書)라고 하였다.

조선 개국 이래 1392년(태조 1)의 개국공신(開國功臣)부터 1728년(영조 4)의 분무공신(奮武功臣)에 이르기까지 약 340년간에 총 28회의 공신이 책록 되었다. 그 중에서 6개의 공신호가 폐지되었는데 위성공신도 그중의 하나였다. 위성공신이 폐삭된 이유는 인조반정(仁祖反正)으로 폐위(廢位)된 광해군이 내린 공신호였기 때문이다.

위성공신에 올랐던 유몽인은 조선 중기의 문신·외교가이자 서예가로 호가 어우당(於于堂)인데 야담(野談)을 집대성한 『어우야담(於于野談)』이 유명하다. 하지만 유몽인은 광해군의 복위를 꾸민다는 이유로 사형되었다가 정조 때에 가서야 복권(復權)된다.

이 문에서는 유몽인을 위성공신(衛聖功臣) 3등에 봉하고 상으로 초상화를 그려 후세에 길이 남기고 관직은 1계(階)를 올리고 부모, 처자에게도 1계를 올려주고 자식이 없을 경우 조카나 사위는 계를 올려주고 적장자는 세습하여 녹을 잃지 않게 하고 반당(伴倘) 6명, 노비 3명, 구사(丘史) 3명, 밭 20결, 은자 5냥, 비단 1필, 내구마(內俓馬) 1필을 주라는 내용이 적혀있다.

초고 수정

조선시대의 문신 유몽인(柳夢寅, 1559~1623)을 광해군 5년(1613)에 공신으로 임명하는 교서(敎書)이다. 위성공신(衛聖功臣)은 임진왜란 때 왕세자였던 광해군(光海君, 재위 1608~1623)을 호종(扈從)한 공이 있는 신하에게 내려진 공신호(功臣號)이고, 교서는 국왕이 내리는 명령서(命令書)이다.

위성공신에는 총 80명의 사람들이 선정되었으며, 공신들은 세운 공적에 따라 3등급으로 나누어 등급별로 차등을 두어 혜택을 받도록 했다. 유몽인은 당시 3등 공신에 책봉되었다.

위성공신은 1623년 인조(仁祖, 재위 1623~1649)가 왕위에 오르고 광해군이 폐위(廢位)되면서 삭탈되었고, 유몽인은 1623년 광해군의 복위를 꾸민다는 모함을 받아 1623년에 사형을 당했다가 정조 18년(1794)에 신원되었다.

이 문서는 현재 고흥읍 호동리의 운곡사(雲谷祠)에 소장되어 있으며, 문서에는 유몽인을 위성공신 3등에 봉한다는 사실과, 공신 책봉으로 받게 될 혜택들, 등급에 따라 지급된 은·노비·토지 등의 수량이 적혀있다.


  • 임진왜란 직후에 조정에서 내려진 문서로서 당시 공신에게 내려진 교서의 형태 및 그 사례연구에 도움이 된다.(민백 의의)
  • 유몽인은 흥양(고흥) 출신 충절인물을 배향하기 위해 1785년에 건립된 운곡사(雲谷祠)에 추배되었다.
  • 위성공신은 1등 10명은 ‘갈충진성동덕찬모좌운위성공신(竭忠盡誠同德贊謨佐運衛聖功臣)’, 2등 17명에는 ‘갈충진성동덕찬모위성공신’, 3등 53명에는 ‘갈충진성위성공신’이라 하였다.

1차 수정

유몽인 위성공신교서는 광해군 5년(1613) 조선시대의 문신 유몽인(柳夢寅, 1559~1623)을 공신에 책봉한다는 내용을 담고 있다. 위성공신은 임진왜란 당시 왕세자였던 광해군(1608~1623 재위)을 호종(扈從)한 공이 있는 신하에게 내린 공신의 명칭이고, 교서는 국왕이 내리는 명령서를 말한다.

당시 위성공신에는 총 80명이 선정되었으며, 공적에 따라 3등급으로 나누고 등급별로 차등을 두어 혜택을 받도록 했다. 그러나 위성공신은 1623년 인조(1623~1649 재위)가 왕위에 오르고 광해군이 폐위되면서 삭탈되었다.

유몽인 위성공신교서는 총 5개의 문단으로 구성되어 있다. 첫 번째 문단은 유몽인의 충심, 인품 등을 서술하고 임진왜란 때의 공을 찬양하였고, 두 번째 문단은 위성공신 3등인 유몽인에게 내려지는 특전과 상을 구체적으로 기술하였다. 세 번째 문단은 공신의 서맹을 담고 있고, 네 번째 문단은 위성공신의 명단이 기록되어 있으며, 마지막 문단은 교서의 발급일을 적고 옥새를 찍어 사실을 증명하였다.

유몽인은 조선시대의 문신, 외교가이자 문장가이다. 선조 22년(1589) 과거에 장원급제하여 관직에 나아갔으며, 여러 차례 명나라에 사신으로 다녀왔다. 저서로는 야담을 집대성한 『어우야담(於于野談)』이 유명하다. 1623년 광해군의 복위를 꾸민다는 모함을 받아 사형을 당했다가 정조 18년(1794)에 신원되었다.

자문의견

  1. 분야별 자문위원 1
    • 유몽인 위성공신교서(柳夢寅衛聖功臣敎書) → 유몽인 위성공신 교서(柳夢寅 衛聖功臣 敎書)
  2. 분야별 자문위원 2
    • 광해군 5년(1613) 조선시대의 문신 유몽인(柳夢寅, 1559~1623)을 공신에 책봉한다는 내용을 담고 있다. -> 광해군 5년(1613) 유몽인(柳夢寅, 1559~1623)을 위성공신에 책봉한다는 내용을 담고 있다.
    • 유몽인 위성공신교서는 총 5개의 문단으로 구성되어 있다. 첫 번째 문단은 유몽인의 중심, 인품 등을 서술하고 임진왜란 때의 공을 찬양하였고, 두 번째 문단은 위성공신 3등인 유몽인 에게 내려지는 특전과 상을 구체적으로 기술하였다. 세 번째 문단은 공신의 서맹을 담고 있고, 네 번째 문단은 위성공신의 명단이 기록되어 있으며, 마지막 문단은 교서의 발급일을 적고 옥새를 찍어 사실을 증명하였다. -> 공신교서에는 유몽인을 위성공신 3등에 봉한다는 사실 을 비롯해 유몽인의 충심과 인품 등을 서술하고 그 공을 찬양하였고, 공신 책봉으로 받게 될 혜택과 위성공신의 명단이 기록되어 있으며, 마지막에 교서의 발급일을 적고 옥새를 찍어 사 실을 증명하였다.
  3. 읽기 쉬운 문안 자문위원
    • 유몽인 위성공신교서는 5개의 문단으로 구성되어 있다.

2차 수정

유몽인 위성공신교서는 조선시대의 문신 유몽인(柳夢寅, 1559~1623)을 광해군 5년(1613) 위성공신에 책봉한다는 내용을 담고 있다. 위성공신은 임진왜란 당시 왕세자였던 광해군(1608~1623 재위)을 호종(扈從)한 공이 있는 신하에게 내린 공신의 명칭이고, 교서는 국왕이 내리는 명령서를 말한다.

당시 위성공신에는 총 80명이 선정되었으며, 공적에 따라 3등급으로 나누고 등급별로 차등을 두어 혜택을 받도록 했다. 그러나 위성공신은 1623년 인조(1623~1649 재위)가 왕위에 오르고 광해군이 폐위되면서 삭탈되었다.

유몽인 위성공신교서는 5개의 문단으로 구성되어 있다. 첫 번째 문단은 유몽인의 충심, 인품 등을 서술하고 임진왜란 때의 공을 찬양하였고, 두 번째 문단은 위성공신 3등인 유몽인에게 내려지는 특전과 상을 구체적으로 기술하였다. 세 번째 문단은 공신의 서맹을 담고 있고, 네 번째 문단은 위성공신의 명단이 기록되어 있으며, 마지막 문단은 교서의 발급일을 적고 옥새를 찍어 사실을 증명하였다.

유몽인은 선조 22년(1589) 과거에 장원급제하여 관직에 나아갔으며, 여러 차례 명나라에 사신으로 다녀왔다. 저서로는 야담을 집대성한 『어우야담(於于野談)』이 유명하다. 1623년 광해군의 복위를 꾸민다는 모함을 받아 사형을 당했다가 정조 18년(1794)에 신원되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