토론:역동 유허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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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21년 국문집필

기존 국문

이 비는 고려말 학자 역동(易東) 우탁(禹倬)의 옛 집터에 세워져 있던 것을 조선 고종(高宗) 17년(1880) 4월 예안면 선양동에 옮겨 세우고 뒷면에 기록을 새겼다. 후에 안동댐 건설로 현 위치로 옮겼다.

역동은 당시 아무도 해득하지 못하던 주역을 1개월만에 스스로 터득하고 그것을 동방에 가져왔다고 하여 호를 역동이라 하였다. 우탁의 자(字)는 천장(天章)․탁보(卓甫)이고, 호는 백운당(白雲堂) 또는 단암(丹巖)이라고도 하며, 시호는 문희(文僖)이다. 그는 우리나라 성리학(性理學)의 선구자이며, 시조 문학의 효시인 탄로가(嘆老歌)를 남겼다.

이 비는 정면․측면 각 1칸 맞배지붕의 비각에 보존되어 있다. 귀부(龜趺) 위에 비신(碑身)을 세웠고 개석(蓋石)으로 용모양의 비머리(螭首)를 얹었으며, 비문(碑文)은「고려좨주역동우탁선생유허(高麗祭酒易東禹倬先生遺墟)」라 쓰여 있다. 비면(碑面)의 너비는 77cm이며, 비신의 높이는 190cm이다.

수정 국문

초고

이 비석은 고려시대의 학자 우탁(禹倬, 1262-1342)의 옛 집터에 있던 것이다.

우탁은 단양 출신으로 1290년 과거에 급제하였다. 북송의 성리학자 정이(程頤, 1033-1107)의 『주역』 주석서가 고려에 전해졌을 때, 이를 온전히 이해하는 사람이 없었는데, 역학에 조예가 깊었던 우탁이 이를 깊이 연구하고 터득하여 학생들을 가르쳤다. ‘역이 동쪽으로 왔다’는 뜻을 나타내는 우탁의 호는 여기에서 유래하였다. 우탁은 말년에 안동에 머물렀다.

비석은 고종 17년(1880) 예안면에 세워졌던 것을 안동댐 건설로 인해 1976년 댐 가장자리로 옮겼다가, 1998년에 다시 지금의 자리로 옮겨 세웠다.

비석에 새겨진 내용을 살펴보면, 조선 정조 13년(1789)에 후손들과 지역 사람들이 처음 유허비를 세웠다고 되어 있으므로, 한 자리에서 옛 비를 새 것으로 대체하였거나, 혹은 새로 새겨서 옮긴 것이 아닐까 추측된다. 기록에 따르면 비문은 이우량(李宇亮)이 지었고, 김흥락(金興洛)이 글씨를 썼다.

지금은 비각 안에 보존되어 있으며, 거북 모양의 받침돌 위에 몸돌을 세우고, 위에는 용을 새겨 장식한 사각형의 머릿돌을 올린 형태이다.

  • 비각 세운 시점 알 수 없으나, 이건 당시 옮긴 것으로 추측됨.

1차 수정

유허비는 선인들의 자취가 남아있는 곳에 그들의 삶을 기리기 위하여 세운 비석을 말한다. 역동 유허비는 고려시대의 학자 역동 우탁(易東 禹倬, 1262-1342)의 옛 집터를 기념하기 위해 고종 17년(1880)에 세운 것이다. 원래 예안면 의양동에 세워졌으나 안동댐 건설로 인해 1976년 댐 가장자리로 옮겼다가, 1998년에 다시 지금의 자리로 옮겨 세웠다.

우탁은 단양 출신으로 충렬왕 16년(1290) 과거에 급제하였다. 북송의 성리학자 정이(程頤, 1033~1107)의 『주역(周易)』 주석서가 고려에 전해졌을 때, 이를 온전히 이해하는 사람이 없었는데, 역학에 조예가 깊었던 우탁이 이를 깊이 연구하고 터득하여 학생들을 가르쳤다. ‘역이 동쪽으로 왔다’는 뜻을 나타내는 우탁의 호는 여기에서 유래하였다. 우탁은 말년에 안동에 머물렀다.

유허비는 거북 모양의 받침돌 위에 몸돌을 세우고, 용을 새겨 장식한 사각형의 머릿돌을 올린 형태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