토론:안동 한천정사
2020 한중연 안내문안 작성
기존 국문
없음.
수정 국문
초고
이 건물은 조성당(操省堂) 김택룡(金澤龍, 1547-1627)의 학덕을 기리기 위해 그의 후손과 제자, 지역 유림이 정조 10년(1786년)에 건립하였다. 기존에 그의 위패를 모시고 사당 역할을 하던 한천사(寒泉祠)를 훼철하고 이 건물을 사당과 정사의 용도로 사용하였으며, 1910년 현재 위치로 옮겼다.
김택룡은 이황(1501-1570)의 제자인 조목(1524-1606)의 문인이다. 조목의 죽자 그를 도산서원에 종향하는 데 주도적인 역할을 담당했다. 1588년(선조 21) 문과에 급제한 후 여러 관직을 역임했다. 임진왜란 때는 왜적을 무찌르고 선조를 호가하는 등의 공이 인정되어 선무(宣撫) 2등의 훈작을 받았다. 전쟁 이후 농경을 장려해 백성을 정착하도록 하고, 향촌 교화와 후진 양성 등 지역의 주요 인물로 꼽힌다.
한천정사의 이름은 주자연보(朱子年譜)의 기록에 주희(朱熹)가 그의 모친상을 당하여 묘소 근처에 한천정사를 지어 머물렀던 고사에서 따온 것이다. 주희는 한천정사에서 머물며 여조겸(呂祖謙)과 함께 근사록(近思錄)을 편찬하기도 하였으니 그의 학덕을 기리는 의미로 붙인 것이다.
1차 수정
한천정사는 조선 중기의 문신인 김택룡(金澤龍, 1547~1627)의 학덕을 기리기 위해 그의 후손과 제자, 지역 유림이 1786년에 건립하였다.
김택룡은 조목(趙穆, 1524~1606)과 이황(李滉, 1502~1570)의 제자로, 1588년 과거에 급제한 후 여러 관직을 지냈다. 임진왜란 이후에는 농경을 장려해 백성을 정착시키는 데 힘썼고, 향촌 교화와 후진 양성 등에 주력하였다.
원래 이 건물은 김택룡의 위패를 모신 한천사(寒泉祠)라는 사당에 있었다. 그러나 서원철폐령으로 사당이 훼손된 후, 1910년 이 건물을 현재의 위치로 옮기고 위패를 모시는 사당과 교육공간인 정사 두 가지 용도로 사용하였다. 한천정사의 이름은 주희(朱熹)가 모친상을 당한 후 묘소 근처에 한천정사를 지어 머물렀다는 고사에서 따온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