토론:안동 하회 양진당
해설문
기존 국문
이 집은 풍산류씨 대종택으로, 풍산에 살던 류종혜 柳從惠가 하회마을에 들어와 최초로 지은 집이기에 유서가 깊다. 15세기 무렵에 지은 후 임진왜란 때 화재를 겪기도 하였고, 여러 대에 걸쳐 지어진 흔적이 남아 있다. 대종택답게 웅장한 규모를 자랑하며, 문중의 모임을 이 곳 사랑채에서 가진다. ‘양진당’이라는 이름은 풍산 류씨 족보를 최초로 완성한 류영 柳泳 1687~1761의 호에서 따온 것이며, 사랑채에 걸려 있는 현판-‘입암고택 立巖古宅 ’은 류운룡의 아버지인 류중영 柳仲郢의 호에서 따온 것이다.
2020 초고
양진당은 15세기 무렵에 지은 풍산류씨 대종택이다. 류종혜가 하회마을에 정착하면서 최초로 지은 집이며 조선 중기의 문신이자 학자인 류운룡(1539~1601) 가문의 종가집이다. 하회마을에서 가장 좋은 땅으로 꼽히는 곳에 자리잡았다. 임진왜란 때 화재를 겪기도 하였고, 여러 대에 걸쳐 지어진 흔적이 남아 있다.
이 집은 사랑채와 안채, 행랑채가 이어져 있고, 사랑채 뒤편에 사당이 있다. 사랑채는 문중의 제사가 있을 때 제사공간으로 사용하는 곳이다.
양진당이라는 이름은 류운룡의 후손이자 최초로 풍산류씨 족보를 완성한 류영(1687~1761)의 호에서 따온 것이다.
사랑채 앞에는 '입암고택'이라고 하는 다른 이름의 현판이 있는데, 이 이름은 류운룡의 아버지인 류중영(1515-1573)의 호에서 따온 것이며, 현판의 글씨는 조선 중기의 이름난 서예가 한호의 글씨이다.
2020 1차 수정
양진당은 풍산류씨 대종택으로서, 조선 중기의 문신이자 학자인 류운룡(1539~1601) 가문의 종택이다.
이 곳은 류운룡의 선조 류종혜가 14세기 말 하회마을에 처음 들어왔을 때 터를 잡은 곳이라고 하며, 집의 건물은 류운용의 아버지 류중영(1539~1601)의 의해 지어졌다고 한다. 그 후 임진왜란 때 화재를 겪어 고쳐지었고, 여러 대에 걸쳐 다시 지은 흔적을 안고 있다.
이 집은 사랑채와 안채, 행랑채가 이어져 있고, 사랑채 뒤편에 사당이 있다. 사랑채는 문중의 제사가 있을 때 제사 공간으로 사용한다.
이 집의 이름인 ‘양진당’은 류운룡의 후손이자 최초로 풍산류씨 족보를 완성한 류영(1687~1761)의 호에서 따온 것이다. 사랑채 앞에는 ‘입암고택’이라고 쓴 현판이 걸려있는데, 이 이름은 류운룡의 아버지인 류중영의 호에서 따온 것이다.
양진당의 맞은편에는 류운룡의 동생인 류성룡(1542~1607) 가문의 종택인 충효당이 있다.
참고
- 6세: 류종혜
- 12세: 류중영(1515-1573)
- 13세: 류운룡(1539-1601)
- 류영(1687-1761) - 류운룡의 6대손
- 문중 행사가 있을 때는 방문을 들어올려 대청을 확장할 수 있게 하였다. 사랑채는 제사가 있을 때 제청으로 사용했고, 평상시에는 손님을 접대하거나 문중 회의를 하는 곳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