토론:안동 하회마을 빈연정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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해설문

기존 국문

이 정사는 겸암 謙菴 류운룡 柳雲龍 이 관직을 사퇴한 후, 선조 16년 1583 에 서재로 쓰기 위해 지은 것이다. 처음에는 살림집인 양진당 근처에 지었는데, 1914년에 풍남초등학교를 개교하면서 현재 위치로 정사를 옮겨 양진당과는 다소 떨어지게 되었다. 이 정사의 이름은 부용대 절벽 아래의 깊은 물을 ‘빈연 賓淵’이라 부른 데서 유래하였다. 지금의 형상으로는 짐작할 길이 없으나, 류운룡은 정사 앞마당에 작은 연못을 파고 연꽃도 길렀다고 한다.

2020 초고

빈연정사는 류운룡(1539~1601)이 1583년에 지었다. 정사는 심신을 수양하고 학문을 닦기 위해 짓는 건물이다. 관직을 사퇴한 후 서재로 쓰기 위해 살림집인 양진당 근처에 지었는데, 1914년에 풍남초등학교를 개교하면서 현재 위치로 옮겨 양진당과는 다소 떨어지게 되었다.

하회에서 태어난 류운룡은 대유학자인 이황의 제자로 학문에 힘썼고 관직에 있을 때 어진 행정으로 이름이 높았다.

정사는 온돌방과 마루를 나란히 두었으며, 방에는 들문을 달아 대청을 확장하여 쓸 수 있게 하였다. 대청에 앉으면 출입문인 일각문 담장 너머로 부용대의 풍광이 마주 보인다. 지금은 자취를 찾을 수 없으나, 류운룡은 정사 앞마당에 작은 연못을 파고 연꽃도 길렀다고 한다.

이 정사의 이름은 부용대 절벽 아래의 깊은 물을 ‘빈연’이라 부른 데서 유래하였다.

2020 1차 수정

이 건물은 류운룡(柳雲龍, 1539~1601)이 선조 16년(1583)에 관직을 사퇴하고 하회마을에 돌아왔을 때 서재로 쓰기 위해 지은 집이다. 수양과 공부의 장소로 지은 건물을 정사라고 한다. 원래는 류운룡의 살림집인 양진당 뒤편에 있었으나 그곳에 초등학교가 세워지면서 1914년에 현재의 위치로 옮기게 되었다.

하회에서 태어난 류운룡은 대유학자인 이황의 제자로 학문에 힘썼고 관직에 있을 때 어진 행정으로 이름이 높았다.

정사는 온돌방과 마루를 나란히 두었으며, 방에는 들문을 달아 대청을 확장하여 쓸 수 있게 하였다. 대청에 앉으면 출입문인 일각문 담장 너머로 부용대의 풍광이 마주 보인다. 지금은 자취를 찾을 수 없으나, 류운룡은 정사 앞마당에 작은 연못을 파고 연꽃도 길렀다고 한다.

이 건물의 이름은 부용대 절벽 아래의 깊은 물을 ‘빈연(賓淵)’이라 부른 데서 유래하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