토론:안동 태사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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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21년 국문집필

기존 국문

이 건물은 고려 건국에 공을 세운 삼태사(三太師)인 김선평(金宣平), 권행(權幸), 장정필(張貞弼)의 위패를 모신 곳이다. 『태사묘사실기년(太師廟事實紀年)』에 의하면 고려 성종(成宗) 2년(983)에 처음으로 삼태사의 제사를 지냈다고 한다. 조선 성종(成宗) 12년(1481)에 터전을 마련했고, 중종(中宗) 35년(1540)에 현 위치에 사당을 건립하였다. 광해군(光海君) 5년(1613)에 확대․재건하여 그 이름을 태사묘라고 하였다.

한국전쟁 중에 소실된 것을 1958년에 보수․완공하였는데 여기에는 보물각, 숭보당, 동서재, 경모루, 안묘, 차전각 등이 있다. 묘정에는 삼공신비가 있고 보물각 내에는 삼공신의 유물이 보존되어 있다. 태사묘는 정면 5칸, 측면 3칸, 자연석 기단 위에 주춧돌을 놓은 ‘一’자형 집이다.

수정 국문

초고

이곳은 고려 건국에 공을 세운 김선평(金宣平), 권행(權幸), 장정필(張貞弼)의 위패를 모시고, 이들을 위한 제사를 올리는 장소이다.

세 사람은 930년 고려 태조 왕건(877-943)과 후백제의 견훤이 고창(안동의 옛 지명) 지역에서 전투를 벌였을 때 고려가 전쟁에서 승리하도록 도왔고, 이 전투에서 승리한 고려는 936년 후삼국을 통일하였다. 왕건은 이후 세 사람을 공신으로 추대하고 태사(太師)의 벼슬을 하사했으며, 이 지역에 '동쪽을 평안하게 하다'는 뜻의 '안동'이라는 새 이름을 내렸다.

태사묘는 고려 성종(成宗) 2년(983)에 안동부(安東府) 내에 세 공신의 제사를 지내기 위해 세운 ‘삼공신묘(三功臣廟)’에서 비롯되었다. 조선 중종 37년(1542)에 현재 위치로 옮겨 지어졌으며, 임진왜란 때 불에 탄 것을 광해군(光海君) 5년(1613)에 규모를 확대해 재건하면서 ‘태사묘’로 이름을 바꾸었다. 한국전쟁 때 소실된 것을 1958년에 복원하였으며, 이후에도 여러 차례 보수되었다. 매년 음력 2월과 8일에 이들을 위한 향사를 모신다.

경내 가장 안쪽에 위패를 모신 태사묘 건물이 있고, 태사묘 주변에는 낮은 담이 둘러져 있다. 아래쪽에는 제사 참석자들이 머무는 동‧서재와 회의장으로 쓰이는 숭보당, 회의나 제향이 있을 때 북을 치는 경모루가 ‘ㅁ’자 형태로 배치되어 있다.

그 외에 제기 보관을 위한 전사청과 차전놀이 용구를 비치한 차전각, 안중 할머니와 안금이(安金伊)의 위패를 봉안한 안묘당(安廟堂), 삼공신 관련 유물이 전시되어 있는 보물각, 관리인이 머무는 주사 건물이 있다.

  • 신(新)안동김씨의 시조는 김선평, 안동장씨의 시조는 장정필, 안동권씨의 시조는 권행이다. 권행은 왕건에게 성을 하사받았다.
  • 안중할머니는 병산전투 당시 고삼으로 술을 빚어 견훤의 군사들을 취하게 만든 뒤 삼공신군에게 급습하게 했다는 설화의 주인공이다. 안금이는 태사묘의 문지기였는데 임진왜란 때 삼태사의 위패를 가지고 피신했다가 전쟁이 끝난 후 이곳으로 다시 위패를 모셔왔다.
  • 안동 차전놀이는 병산전투의 승리를 기념해 전승된 것이다. 견훤을 낙동강으로 밀어 넣었다는 데서 생겼다고도 하고 삼태사가 수레 여러 개를 만들어 타고 견훤의 군대를 밀어냈다는 데서 생긴 놀이라고도 한다.
  • 보물각(寶物閣)과 경모루(景慕樓)는 1963년에 증축하였다.

1차 수정

태사묘는 고려 건국에 공을 세운 김선평(金宣平, 901~?), 권행(權幸), 장정필(張貞弼, 888~?)의 위패를 모시고, 이들을 위한 제사를 올리는 곳이다.

세 사람은 930년 고려 태조 왕건(王建, 918~943 재위)과 후백제의 견훤(甄萱, 867~936)이 고창(안동의 옛 지명) 지역에서 전투를 벌였을 때 고려가 전쟁에서 승리하도록 도왔고, 이 전투에서 승리한 고려는 936년 마침내 후삼국을 통일하였다. 왕건은 세 사람을 공신으로 추대하고 태사(太師)의 벼슬을 하사했으며, 이 지역에 ‘동쪽을 평안하게 하다’라는 뜻의 ‘안동’이라는 새 이름을 내렸다.

태사묘는 고려 성종 2년(983) 삼태사의 제사를 지내기 위해 세운 ‘삼공신묘(三功臣廟)’에서 비롯되었다. 조선 중종 37년(1542) 현재 위치로 옮겨 지어졌으며, 임진왜란 때 불에 탄 것을 광해군 5년(1613)에 규모를 확대해 재건하면서 ‘태사묘’로 이름을 바꾸었다. 한국전쟁 때 소실되었다가 1958년에 복원하였으며, 이후에도 여러 차례 보수되었다. 매년 음력 2월과 8월에 제사를 지내고 있다.

경내 가장 안쪽에 위패를 모신 태사묘가 있고, 태사묘 주변에는 낮은 담이 둘러져 있다. 태사묘 앞에는 회의장으로 쓰이는 숭보당, 제사 참석자들이 머무는 동‧서재, 회의나 제향이 있을 때 북을 치는 경모루 등 여러 부속건물이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