토론:안동 장태사공 성곡재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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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21년 국문집필

기존 국문

성곡재사는 고려 초 삼태사(三太師) 가운데 한 사람인 장정필(張貞弼, 初諱 吉)의 제단을 수호하고 제사를 준비하기 위한 건물로 1806년에 건립하고 1853년에 중건하였다.

이 재사는 향교 및 서원의 배치형식을 취하고 있으며, 비교적 큰 규모의 재사로 당시의 양식이 제대로 잘 보존되어 있다. 특히 강당은 완만하게 굽은 대들보를 사용하여 운치를 자아내며 19세기 중반의 재사 건축 유형을 잘 보여준다.

삼태사는 고창(안동의 옛 지명) 전투에서 왕건을 도와 고려의 후삼국 통일에 결정적인 공을 세워 태사에 봉해진 안동김씨 김선평과 안동김씨 권행, 안동장씨 장정필을 말한다.

수정 국문

초고

성곡재사는 안동장씨의 시조 장정필(張貞弼, 888~?)의 묘단을 관리하고 제사를 지내기 위해 세운 재실로, 조선 순조 6년(1806)에 처음 건립되었다.

장정필은 고창(안동의 옛 지명) 지역의 호족이었다. 930년 고려 태조 왕건(王建, 918~943 재위)과 후백제의 견훤(甄萱, 867~936)이 고창에서 전투를 벌이자, 김선평(金宣平, 901~?), 권행(權幸), 장정필(張貞弼, 888~?)과 함께 고려가 전쟁에서 승리하도록 도왔다. 이 전투에서 승리한 고려는 936년 마침내 후삼국을 통일하였고, 왕건은 세 사람을 공신으로 추대하며 태사(太師)의 벼슬을 하사하였다. 또한 고창에 ‘동쪽을 평안하게 하다’라는 뜻의 ‘안동’이라는 새 이름을 내렸다.

장정필은 김선평이나 권행과 달리 묘가 어디 있는지도 확인이 어려웠었는데, 헌종 8년(1842)에 무덤들을 조사한 끝에 ‘장정(張貞)’이라는 두 글자가 있는 지석(誌石) 조각을 찾아 묘를 증빙하였다고 한다.

성곡재사는 철종 4년(1853)에 중건되었으며, 1966년 콘크리트 구조로 누문인 영휘루(永輝樓)를 지으면서 지금의 모습을 갖추게 되었다. 경내에는 재사, 강당, 동서재, 관리사 건물이 있다.

1차 수정

성곡재사는 안동장씨의 시조 장정필(張貞弼, 888~?)의 제단을 관리하고 제사를 지내기 위해 순조 6년(1806)에 건립되었다.

김선평은 고창(안동의 옛 지명) 지역의 성주였다. 930년 고려 태조 왕건(王建, 918~943 재위)과 후백제의 견훤(甄萱, 867~936)이 고창에서 전투를 벌이자, 김선평은 권행(權幸), 장정필(張貞弼, 888~?)과 함께 고려가 전쟁에서 승리하도록 도왔다. 이 전투에서 승리한 고려는 936년 마침내 후삼국을 통일하였고, 왕건은 세 사람을 공신으로 추대하며 태사(太師)의 벼슬을 하사하였다. 또한 고창에 ‘동쪽을 평안하게 하다’라는 뜻의 ‘안동’이라는 새 이름을 내렸다.

장정필의 묘는 그 위치를 확인하기가 어려웠는데, 헌종 8년(1842) 재사 인근의 무덤들을 조사한 끝에 ‘장정(張貞)’이라는 두 글자가 있는 지석(誌石) 조각을 찾아 묘를 증빙하였다고 한다.

성곡재사는 철종 4년(1853)에 중건되었으며, 1966년 콘크리트 구조의 누문인 영휘루(永輝樓)를 지으면서 지금의 모습을 갖추게 되었다. 경내에는 재사, 강당, 동서재, 관리사 건물이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