토론:안동 임청각
2020 한중연 안내문안 작성
기존 국문
임청각은 1515년(중종 10)에 형조좌랑을 지냈던 고성이씨 이명(李洺)이 지은 집으로 원래는 99칸의 집이었다고 하나 지금은 50여 칸만 남아 있다. 우리나라에서 가장 오래된 민가 중 하나인 이 집은 독립운동가이며 대한민국 임시정부 초대 국무령을 지낸 석주(石洲) 이상룡(李相龍, 1858~1932)의 생가이며, 삼대에 걸쳐 독립유공자를 배출한 유서 깊은 곳이다.
용(用)자가 가로 누은 듯한 독특한 평면구성으로 이루어진 이 건물은 남녀와 계층별로 매우 뚜렷한 공간 구분을 이루고 있어 건물의 위계질서가 매우 분명함을 알 수 있다. 별당형식의 정자 건물인 군자정(君子亭)은 임청각의 사랑채로서 평면이 ‘丁’자를 옆으로 누인 형태이다. 이 정자 내부에는 이 곳을 찾은 시인문객들이 아름다운 자연에 취하여 지은 시들이 걸려 있다.
임청각이란 당호는 퇴계 이황의 친필로 도연명의 귀거래사 중「동쪽 언덕에 올라 길게 휘파람 불고, 맑은 시냇가에서 시를 짓기도 하노라」에서 따온 것이다. 건물 앞을 흐르는 낙동강과 영남산 자락에 터전을 잡은 건물이 자연환경과 잘 어울린다.
수정 국문
초고
임청각은 조선 전기의 문신인 이명(李洺)이 1515년에 지은 집이다.
이명은 좌명공신이자 좌의정을 지낸 이원(李原, 1368~1429)의 손자이다. 1504년 연산군의 폭정인 갑자사화 당시에 유배되었다. 중종반정 이후 현감을 지냈는데 어진 사람이란 칭송을 들었다. 이후 안동으로 돌아가 임청각을 짓고 풍류를 즐겼다.
임청각은 이명의 후손인 이상룡(李相龍, 1858~1932)의 생가로도 유명하다. 이상룡은 1910년 일본에 나라를 빼앗긴 이듬해 임청각을 팔아 독립 자금을 마련하였다. 만주로 가서 신흥무관학교를 세우고 평생 독립 투쟁을 하였다. 대한민국 임시정부의 초대 국무령을 지내기도 했다.
임청각은 현존하는 살림집 가운데 가장 오래됐다. 안채와 중채, 사랑채, 행랑채, 사당, 별채까지 모두 99칸이다. 사대부의 집은 100칸을 넘지 못하게 규정되었는데 정확하게 99칸을 채웠다. 그만큼 부유한 집안이라는 의미이다. 1942년 일제가 불온한 조선 사람이 다수 출생한 집이라 하여 임청각 마당을 가로질러 중앙선 철로를 놓았다. 이 때문에 행랑과 부속 건물이 철거되어 50칸으로 규모가 줄어들었다. 그러나 여전히 웅장한 사대부 집의 면모를 확인할 수 있다.
임청각은 도연명의 귀거래사 가운데 “동쪽 언덕에 올라 길게 휘파람 불고, 맑은 시냇가에서 시를 짓기도 하노라”는 구절에서 글자를 따온 것이다. 이웃한 도산서원에 머물던 이황이 현판의 글씨를 직접 썼다.
1차 수정
임청각은 조선 전기의 문신인 이명(李洺)이 1515년에 지은 집이다.
이명의 할아버지 이원(李原, 1368~1429)은 조선 초 태종이 왕자의 난을 평정하고 왕위에 오르는 데 협력하여 공신이 되었으며 세종 때 좌의정을 지냈다. 이러한 선조의 공훈을 인정받아 이명은 과거를 거치지 않고 관직에 나갔으며, 갑자사화 당시에 유배되었다가 1506년 중종이 즉위한 이후 풀려나 의흥(지금의 군위 지역)의 지방관을 지냈다. 벼슬하는 동안에는 어진 사람으로 이름이 높았고, 이후 고향인 안동으로 돌아가 임청각을 짓고 풍류를 즐겼다.
임청각은 이명의 후손인 독립운동가 이상룡(李相龍, 1858~1932)의 생가로도 유명하다. 이상룡은 1910년 일본에 나라를 빼앗긴 이듬해 임청각을 팔아 독립 자금을 마련하였다. 만주로 가서 신흥무관학교를 세우고 평생 독립 투쟁을 하였으며, 대한민국 임시정부의 초대 국무령을 지내기도 했다.
임청각은 우리나라에 현존하는 살림집 가운데 가장 오래된 집이다. 안채와 중채, 사랑채, 행랑채, 사당, 별당 등으로 이루어져 있다. 원래는 99칸의 대저택이었다고 하나, 1942년 일제가 불온한 조선 사람이 다수 출생한 집이라 하여 임청각 마당을 가로질러 중앙선 철로를 놓는 바람에 규모가 줄어들었다. 그러나 여전히 웅장한 사대부 집의 면모를 확인할 수 있다.
임청각은 중국 시인 도연명(陶淵明, 365~427)의 「귀거래사(歸去來辭)」 가운데 “동쪽 언덕에 올라 길게 휘파람 불고, 맑은 시냇가에서 시를 짓기도 하노라”는 구절에서 글자를 따온 것이다. 이웃한 도산서원에 머물던 이황(李滉, 1502~1570)이 현판의 글씨를 직접 썼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