토론:안동김씨 종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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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20 한중연 안내문안 작성

기존 국문

이 건물은 조선 성종(成宗) 때 양소당(養素堂) 김영수(金永銖, 1446~1502)가 지었다고 한다. 김영수는 자(字)가 적옹(積翁), 호(號)는 양소당이며 태사(太師) 김선평(金宣平)의 후손으로 사헌부 장령을 역임하였다. 안동김씨 소산입향조인 비안공 삼근의 손자이다.

건물의 구성은 사랑채, 중문간채, 안채로 구성된 ‘口’자형 몸채가 있고 그 오른쪽에 사당이 있다. 몸채의 왼쪽에 담을 쌓아 안채에서만 사용할 수 있는 독립된 외부공간을 마련하였다.

사랑채는 2칸의 사랑방과 2칸의 대청이 나란히 배열되어 있고 뒷편에 1/4칸 규모의 수납공간과 2칸 규모의 부속방이 있다.

겹집으로 구성된 안채는 2칸의 안방과 대청이 있고 안방 앞에는 툇마루가 있고 그 위에 벽장이 있다. 대청 옆에 다락이 있다. 이러한 형식은 이 지역에서 나타나는 유형이다.

수정 국문

초고

이 집은 조선 성종 대의 관료 양소당 김영수(養素堂 金永銖, 1446~1502)의 고택이다. 김영수의 본관은 안동이며, 안동김씨의 시조이자 고려의 개국공신인 김선평(金宣平)의 11대손이다. 김영수의 현손(고손)에 이르러 척화의 상징 김상용(金尙容, 1561~1637) · 김상헌(金尙憲, 1570~1652) 형제가 나왔으며, 그로부터 2, 3대 후인 김수항(金壽恒 1629~1689)-김창협(金昌協 1651~1708) 부자를 거치면서 안동김씨는 조선 후기 최대의 문벌로 성장하였다. 이곳을 안동김씨종택이라 하는 이유이다.

김영수는 한성부 판관을 지낸 아버지 김계권(金係權, ?~1458)의 5남 중 막내아들로 한양에서 태어났다. 13세에 아버지가 돌아가시자 어머니 예천권씨를 따라 이곳으로 내려왔다. 음서로 벼슬에 나가 의금부 도사, 사헌부 장령, 영천군수 등을 지냈다. 1495년에 형들과 함께 88세의 노모를 위해 정자를 지었는데, 그것이 인근 동오봉에 있는 삼구정(三龜亭)이다.

안동김씨종택은 ㅁ자형의 기와집으로 남서향이다. 대문은 없으며 사랑채와 중문간채, 안채로 구성되어 있다. 안채 우측 뒤편에는 사당이 있다. 사랑채는 정면 4칸으로 왼쪽 2칸에는 방을 두었고, 오른쪽 2칸은 대청으로 개방하였다. 4칸의 사랑채 앞으로 툇마루를 냈다. 안채도 각각 2칸의 안방과 대청이 있고, 안방 앞에는 툇마루를 냈다. 사랑채 들문에서 조선 후기 양식이 나타나는 것을 보아 지금의 집은 후대에 다시 지은 것으로 보인다.

1차 수정

이 집은 조선 전기의 문신 양소당 김영수(養素堂 金永銖, 1446~1502) 가문의 종택이다. 종택은 한 가문의 맏이가 대대로 살아온 집을 말한다. 이 집이 위치한 소산리는 김영수의 할아버지인 김삼근(金三近, 1390~1465)이 15세기 경에 입향한 이래 안동김씨 집성촌이 되었다.

김영수는 어려서부터 무예가 출중하였고, 음서*로 벼슬에 나가 의금부 도사, 사헌부 장령, 영천군수 등을 지냈다. 김영수의 아들은 평양부 서윤을 지낸 김번(金璠, 1479~1544)이고, 증손은 병자호란 때 끝까지 맞서 싸울 것을 주장하였던 예조판서 김상헌(金尙憲, 1570~1652)으로, 이후 김영수의 후손들은 조선 후기 최대의 문벌로 성장하였다.

안동김씨종택은 ㅁ자형의 기와집으로 남서향이다. 대문은 없으며 사랑채와 중문간채, 안채로 구성되어 있다. 안채 우측 뒤편에는 사당이 있다. 안채는 대청을 중심으로 양옆에 각각 안방과 건넌방이 있고, 왼쪽의 안방 앞에는 툇마루를 두었다. 사랑채는 왼쪽에 방을 두었고, 오른쪽은 대청으로 개방하였다. 사랑채와 대청 사이에는 들문을 달아 필요할 때 공간을 확장할 수 있게 하였다.


  • 음서(蔭敍): 고려시대와 조선시대에 공을 세웠거나 높은 벼슬을 한 양반의 자손을 과거시험 없이 관리로 채용하는 제도.