토론:서울 여운형 묘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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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21년 국문집필

기존 국문

수정 국문

초고

일제 강점기 독립운동가이자 정치가로 활동한 여운형(呂運亨, 1886~1947)의 묘소이다.

그는 1907년 경기도 양평에서 국채보상운동의 지회를 설립하여 활동하였다. 1914년 중국으로 건너가 독립운동에 참여하였는데, 1918년에는 상해에서 신한청년당(新韓靑年黨)를 조직하였고, 1919년에는 대한민국 임시정부 수립에 참여하였다.

1920년에는 소련공산당에 가입하고 사회주의 계열에서 주로 활동을 하였다. 1933년에는 조선중앙일보사 사장직에 취임하였는데, 1936년 베를린 올림픽 마라톤에서 우승한 손기정(孫基禎, 1912~2002) 선수의 일장기 말소사건으로 신문이 폐간되어 사장직에서 물러났다.

한때 정계 은퇴를 선언했었던 그는 1947년 우파세력의 반탁운동과 좌파 세력의 편협성을 비판하는 담화를 발표하면서 정계에 복귀하였다. 김규식(金奎植, 1881~1950), 김창숙(金昌淑, 1879~1962)과 함께 통일적 임시정부 수립의 필요성을 역설하며 민족통일전선운동을 펼치는 등 통일정부 수립을 위해 노력하였다. 이후 이를 반대하는 세력에게 십여 차례 테러를 당하기도 하였는데, 1947년 혜화동 교차로에서 한지근(韓智根)에 의해 저격을 당해 사망하였다.

2005년 건국훈장 대통령장(2급)을 추서 받았는데, 당시 훈장 급수가 업적보다 낮다는 비판이 따랐고, 2008년 건국훈장 대한민국장(1급)을 다시 받았다.

그의 묘소는 봉분을 원형의 병풍석으로 둘렀으며, 묘비와 상석·향로석·망주석 등이 설치되어 있다. 비석은 상단부에 쌍용 문양을 장식하였으며 ‘몽양여운형선생지묘(夢陽呂運亨先生之墓)’라 적혀 있다.

1차 수정

일제강점기 독립운동가이자 정치가인 여운형(呂運亨, 1886~1947)의 묘소이다.

여운형은 경기도 양평 출신으로, 1907년 국채보상운동의 양평지회를 설립하여 활동하며 개신교에 입교하였다. 1914년 중국으로 건너가 독립운동에 참여하였고, 1918년 상해에서 신한청년당을 조직하였으며, 1919년에는 대한민국 임시정부 수립에 참여하였다. 1920년 소련공산당에 가입한 뒤에는 사회주의 계열에서 주로 활동하였다. 1933년에는 조선중앙일보사 사장직에 취임하였는데, 1936년 베를린 올림픽 마라톤에서 우승한 손기정(孫基禎, 1912~2002) 선수의 일장기 말소사건으로 신문이 폐간되어 사장직에서 물러났다.

한때 정계 은퇴를 선언했다가 1947년 우파세력의 반탁운동과 좌파 세력의 편협성을 비판하는 담화를 발표하면서 정계에 복귀하였다. 김규식(金奎植, 1881~1950), 김창숙(金昌淑, 1879~1962)과 함께 통일적 임시정부 수립의 필요성을 역설하며 민족통일전선운동을 펼치는 등 통일정부 수립을 위해 노력하였다. 이후 이를 반대하는 세력에게 십여 차례 테러를 당하기도 하였는데, 1947년 혜화동 교차로에서 한지근(韓智根)이라는 우익 청년에게 암살당하였다. 2005년 건국훈장 대통령장이 추서되었고, 2008년 건국훈장 대한민국장이 추서되었다.

여운형의 묘소는 묘비, 상석, 향로석, 망주석 등의 석물을 갖추었으며, 원형 봉분의 아래쪽에는 병풍석을 둘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