토론:산청 신안정사
2021 안내문안 초안 작성 지원 사업
기존 국문
신안정사는 보래 안동권씨와 성주이씨 두 문중이 고을 선비들과 상의하여 1758년에 창건한 사우(祠宇)로 주자(朱子)를 주향(主享)으로 우암 송시열을 배향(配享)했다.
1868년 훼철되었다가, 1901년 개축하고 1924년 재건되었다.
현재 경내에는 신안정사 1동, 외삼문 1동, 1938년에 건축된 신안서사 1동, 문간채 1동이 있다. 일제시기에 중건된 건물로 건물수준이 비교적 높고 평면 및 창호 구조 등에 근대적인 성격이 잘 나타나 있어 건축사연구에 중요한 자료이다.
수정 국문
초고
이곳은 본래 공자(孔子, B.C. 551~479), 주희(朱熹, 1130~1200), 송시열(宋時烈, 1607~1689)을 제향(祭享)하는 신안영당(新安影堂)을 복원한 건물이다.[1] 중국의 학자 주희는 본관(本貫)이 중국 안휘성(安徽省)의 한 현인 무원(婺源)으로 남북조 시대에 신안군(新安郡)에 속했다. 이에 주희는 평소 자신을 신안 주희(新安 朱熹)라고 불렀다.
신안이라는 이름 자체는 다소 평범한 까닭에 전국에도 여러 곳에서 확인되는 지명이다. 조선은 주자학(朱子學)의 나라이고 주희는 주자학의 종사(宗師)인 까닭에 조선에서는 주희를 제향하는 원우(院宇)를 건립하기를 희망하였다. 그러나 일반적으로 원우는 제향 인물과의 관련성이 있는 곳에 짓는 것이 원칙이기 때문에 함부로 남설할 수는 없었다. 이에 신안을 지명으로 하는 지역에 주로 주희를 제향하는 원우가 지어졌다. 이 원우들의 특징은 그 이름을 신안으로 명명하기 때문에 신안정사, 신안영당, 신안서원(新安書院) 등의 이름이 전국 곳곳에 세워졌다.
이 신안영당은 1538년(중종 35)에 건립되었다가, 고종(高宗)조에 소실되어 초석만 남아있다가 2006년 복원하였다. 영당은 이 지역에서 세거하던 안동권씨와 성주이씨가 합심하여 창건하였다고 한다. 일반적인 주희 원우와는 달리 공자를 함께 모셨던 점이 특징적이다.
한편, 조선후기에는 영남지역에 노론(老論)의 영향력이 강화되는데 그 결과로 노론계 원우가 세워지게 되는 것이 특징이다. 다만, 기존 남인(南人)들의 반발로 원우 설립에 저항이 발생하게 되는데 이때 주로 활용되었던 것이 주희의 원우에 노론의 영수(領袖)인 송시열을 합사(合祀)하는 것이었다. 이로 인해 영덕의 신안영당은 해당지역 유생들에 의해 주희와 송시열의 초상이 불타는 사건이 발생할 정도였다. [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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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차 수정
신안정사는 공자(孔子, 기원전 551~479), 주희(朱熹, 1130~1200), 송시열(宋時烈, 1607~1689)의 영정을 모신 곳이다. 이 지역에 세거하던 안동권씨와 성주이씨 문중에서 합심하여 중종 35년(1538)에 건립하였으며, 고종 때에 소실되어 초석만 남아있던 것을 2006년에 복원하였다.
신안이라는 이름은 주희의 고향을 나타내는 말이다. 주희의 본관은 중국 안휘성(安徽省)의 무원(婺源)으로 남북조시대에 신안군(新安郡)에 속했으며, 주희는 평소 자신을 신안 주희(新安 朱熹)라고 불렀다. 조선은 주자학의 나라였기 때문에, 주자학의 창시자인 주희를 제향하는 사당이 신안정사, 신안영당, 신안서원 등의 이름으로 전국 곳곳에 세워졌다.
산청 신안정사는 주희를 모신 다른 사당들과는 달리 공자와 송시열을 함께 모셨던 점이 특징적이다. 조선 후기에는 영남 지역에 노론(老論)의 영향력이 강화어 노론계 사당이 세워지게 되었으며, 이때 노론의 영수(領袖)인 송시열이 함께 제향되었다.
경내에는 외삼문, 정사, 부속건물이 있으며, 높은 석축 위에 지어진 정사는 대청을 중심으로 양옆에 온돌방을 두었다.
자문의견
- 분야별 자문위원 1
- 신안정사는 공자(孔子, 기원전 551~479), 주희(朱熹, 1130~1200), 송시열(宋時烈, 1607~1689)의 영정을 모신 곳이다. 이 지역에 세거하던 안동권씨와 성주이씨 문중에서 합심하여 중종 35년(1538)에 건립하였다.
신안이라는 이름은 주희의 고향을 나타내는 말이다. 주희의 본관은 중국 안휘성(安徽省)의 무원(婺源)으로 남북조시대에 신안군(新安郡)에 속했으며, 주희는 평소 자신을 신안 주희(新安 朱熹)라고 불렀다. 조선은 주자학의 나라였기 때문에, 주자학의 창시자인 주희를 제향하는 사당이 신안정사, 신안영당, 신안서원 등의 이름으로 전국 곳곳에 세워졌다.
산청 신안정사는 주희를 모신 다른 사당들과는 달리 공자와 송시열을 함께 모셨던 점이 특징적이다. 조선 후기에는 영남 지역에 노론(老論)의 영향력이 강화어 노론계 사당이 세워지게 되었으며, 이때 노론의 영수(領袖)인 송시열이 함께 제향되었다.
경내에는 외삼문, 정사, 영당, 수정궁이 있으며, 이들 건물은 높은 석축 위에 지어졌으며, 정사는 대청을 중심으로 양옆에 온돌방을 두었으며, 현재는 없지만, 주자와 우암 송시열의 영정을 봉안하고 있었다고 하는 영당은 고종 때에 소실되어 초석만 남아있었으나 2006년에 복원하였다.
- 신안정사는 공자(孔子, 기원전 551~479), 주희(朱熹, 1130~1200), 송시열(宋時烈, 1607~1689)의 영정을 모신 곳이다. 이 지역에 세거하던 안동권씨와 성주이씨 문중에서 합심하여 중종 35년(1538)에 건립하였다.
- 분야별 자문위원 2
- 신안정사는 주희(朱熹, 1130~1200), 송시열(宋時烈, 1607~1689)의 영정을 모신 곳이다. 주자의 고향인 중국 신안에 있는 주자사당을 본받아 안동권씨와 성주이씨 문중에서 합심하여 중종 33년(1538)에 건립하였으며, 고종 9년(1872)에 이 건문룽 중수하였다. 영정과 영정을 모시던 영당은 고종 때에 소실되어 영당 초석만 남아있던 것을 2006년에 복원하였다.
경내에는 외삼문, 정사, 부속건물이 있으며, 높은 석축 위에 지어진 정사는 대청을 중심으로 양옆에 온돌방을 두었다.
- 신안정사는 주희(朱熹, 1130~1200), 송시열(宋時烈, 1607~1689)의 영정을 모신 곳이다. 주자의 고향인 중국 신안에 있는 주자사당을 본받아 안동권씨와 성주이씨 문중에서 합심하여 중종 33년(1538)에 건립하였으며, 고종 9년(1872)에 이 건문룽 중수하였다. 영정과 영정을 모시던 영당은 고종 때에 소실되어 영당 초석만 남아있던 것을 2006년에 복원하였다.
- 읽기 쉬운 문안 자문위원
- 신안정사는 공자(孔子, 기원전 551~479), 주희(朱熹, 1130~1200), 송시열(宋時烈, 1607~1689)의 영정을 모신 곳이다. 이 지역에 세거하던 안동권씨와 성주이씨 문중에서 합심하여 중종 35년(1538)에 건립하였으며, 고종 때에 소실되어 초석만 남아있던 것을 2006년에 복원하였다.
신안이라는 이름은 주희의 고향을 나타내는 말이다. 주희의 본관은 중국 안휘성(安徽省)의 무원(婺源)으로 남북조시대에 신안군(新安郡)에 속했으며, 주희는 평소 자신을 신안 주희(新安 朱熹)라고 불렀다. 조선은 주자학의 나라였기 때문에, 주자학의 창시자인 주희를 제향하는 사당이 신안정사, 신안영당, 신안서원 등의 이름으로 전국 곳곳에 세워졌다.
산청 신안정사는 주희를 모신 다른 사당들과는 달리 공자와 송시열을 함께 모셨던 점이 특징적이다. 조선 후기에는 영남 지역에 노론(老論)의 영향력이 강해 노론계 사당이 세워지게 되었으며, 이때 노론의 영수(領袖)였던 송시열이 함께 제향되었다.
경내에는 외삼문, 정사, 부속건물이 있으며, 높은 석축 위에 지어진 정사는 대청을 중심으로 양옆에 온돌방을 두었다.
- 신안정사는 공자(孔子, 기원전 551~479), 주희(朱熹, 1130~1200), 송시열(宋時烈, 1607~1689)의 영정을 모신 곳이다. 이 지역에 세거하던 안동권씨와 성주이씨 문중에서 합심하여 중종 35년(1538)에 건립하였으며, 고종 때에 소실되어 초석만 남아있던 것을 2006년에 복원하였다.
2차 수정
신안정사는 공자(孔子, 기원전 551~479), 주희(朱熹, 1130~1200), 송시열(宋時烈, 1607~1689)의 영정을 모신 곳이다. 이 지역에 세거하던 안동권씨와 성주이씨 문중에서 합심하여 중종 35년(1538)에 건립하였으며, 고종 때에 소실되어 초석만 남아있던 것을 2006년에 복원하였다.
신안이라는 이름은 주희의 고향을 나타내는 말이다. 주희의 본관은 중국 안휘성(安徽省)의 무원(婺源)으로 남북조시대에 신안군(新安郡)에 속했으며, 주희는 평소 자신을 신안 주희(新安 朱熹)라고 불렀다. 조선은 주자학의 나라였기 때문에, 주자학의 창시자인 주희를 제향하는 사당이 신안정사, 신안영당, 신안서원 등의 이름으로 전국 곳곳에 세워졌다.
산청 신안정사는 주희를 모신 다른 사당들과는 달리 공자와 송시열을 함께 모셨던 점이 특징적이다. 조선 후기에는 영남 지역에 노론(老論)의 영향력이 강화되어 노론계 사당이 세워지게 되었으며, 이때 노론의 영수(領袖)였던 송시열이 함께 제향되었다.
경내에는 외삼문, 정사, 부속건물이 있으며, 높은 석축 위에 지어진 정사는 대청을 중심으로 양옆에 온돌방을 두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