토론:범세동 선생 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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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21년 국문집필

기존 국문

범세동은 자가 여명(汝明) 호는 복애(伏崖)이며 금성(錦城)이 본관이다. 남송(南宋) 사람인 증조부가 고려로 망명하였는데 할아버지가 금성군(錦城君)에 책봉됨으로써 금성을 관향으로 삼았다고 한다. 그는 정몽주에게 학문을 배우고 공민왕 때에 과거에 급제하여 간의대부(諫議大夫)를 지내다 조선이 건국되자 두문동(杜門洞)에 숨어들어 은거하였는데 후에 태조와 태종이 관직을 내렸으나 끝까지 응하지 않았고, 저서로 화동인물총기(話東人物叢記)와 화해사전(華海師全)이 있다. 1825년(순조 25)에 범씨들의 집성촌인 북구 생룡동에 복룡사(伏龍祠)가 세워지면서 그곳에 배향되었다. 묘역에는 대리석으로 만든 묘비, 문인석, 상석, 양석, 동자석, 망주 등의 석물이 있는데 묘비와 문인석을 제외하고는 뒤에 보완한 것이다.

수정 국문

고려시대의 학자이자 문신인 범세동(范世東)의 무덤이다.

범세동은 공민왕 18년(1369) 과거에 합격한 뒤 여러 관직을 지냈다. 고려가 망하고 조선왕조가 세워지자, 벼슬을 버리고 은거하다가 고향인 나주(지금의 광산구)로 돌아왔다. 이후 태종(1400~1418 재위)이 여러 차례 벼슬을 권하였으나 끝내 사양하였다고 한다.

봉분 앞에는 상석, 향로석, 묘비, 망주석, 문인석, 동자석, 석양 등의 다양한 석물이 있는데, 이중 묘비와 문인석만 무덤이 조성될 때 만들어진 것이고 나머지는 후대에 보충한 것이다. 봉분 왼쪽 앞에 있는 묘비는 화강암으로 만든 받침돌, 하나의 대리석으로 만든 몸돌과 머릿돌로 이루어져 있다. 머릿돌은 연잎을 엎어놓은 무늬를 새겼는데, 이는 조선 전기에 만들어진 묘비에서 볼 수 있는 양식이다. 문인석은 각이 진 관모를 썼고, 얼굴에는 이목구비가 뚜렷하며, 두 손을 가슴에 모아 홀을 들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