토론:백하구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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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22년 국문집필

기존 국문

이 집은 구한말(舊韓末)에서 일제강점기에 애국계몽(愛國啓蒙) 및 조국 광복(光復) 운동에 몸바친 백하 김대락(金大洛, 1845~1914)이 1885년에 건축한 가옥이다. ‘口’자형 정면 8칸, 배면 5칸, 측면 5칸의 홑처마 골기와집이다.

김대락은 1907년 이상룡(李相龍), 김동삼(金東三) 등과 함께 근대적 민족 교육을 위해 이 곳 사랑채에 근대식 학교인 협동학교(協同學校)를 설립하였다. 장소가 협소한 관계로 사랑채 4칸을 확장하여 임시교사(臨時校舍)로 사용하다가, 후일 가산서당(可山書堂)으로 옮겼다 한다.

김대락은 1910년 나라를 일본에 빼앗기자 독립운동 기지(基地) 마련을 위해 만주로 갔으며, 신흥무관학교(新興武官學校) 건립 때에는 고향에 있던 재산과 이 집 사랑채까지 팔아 학교 건립 자금으로 제공하였다. 당시 철거된 사랑채의 기단과 주춧돌 일부가 남아 있고, 현재의 사랑채 마루방 2칸은 1925년 문내(門內)의 제청(祭廳)을 옮겨다 지은 것이라 한다.

수정 국문

초고

이 집은 일제강점기 때 독립운동가로 활약한 백하 김대락(白下 金大洛, 1845~1914)이 조선 고종 22년(1885)에 지은 살림집이다. 2008년 5월 국가보훈처 현충 시설로 지정되었다.

김대락은 1910년 일제에 국권을 빼앗기자 재산과 집을 처분한 후 가족을 포함해 150여 명을 이끌고 만주로 망명하였다. 그는 서간도 지역 최초의 한인 자치단체인 경학사 조직에 기여하였고, 신흥무관학교(新興武官學校)의 건립 자금을 대는 등 조국의 광복을 위해 힘썼으며, 이러한 공로를 인정받아 1990년에 건국훈장 애족장이 추서되었다.

집은 ‘口’자형의 평면으로 이루어져 있다. 중문을 기준으로 서쪽은 사랑채, 동쪽은 아래채로 쓰였고, 문 안쪽에 좌우 날개채가 딸린 안채가 있다.

사랑채는 1907년에 설립된 근대식 교육 기관인 ‘협동학교(協同學校)’의 교사로 쓰이기도 했다. 김대락은 처음에는 근대식 교육을 반대했는데, 이후 신교육의 필요성을 깨닫고 자신의 집 사랑채를 확장해 교실로 내어놓았다고 한다. 만주로 망명하기 위해 집을 처분하면서 한 차례 헐렸는데, 당시 철거된 사랑채의 기단과 주춧돌 일부가 아직 남아 있다. 지금의 사랑채 마루방은 1925년 가문의 제청(祭廳)을 옮겨다 지은 것이라 한다.

  • 이 집이 자리한 내앞마을은 의성김씨 가문의 후손들이 모여 사는 집성촌이다.
  • 사랑채에는 향유(鄕儒)인 금상기(琴相基)가 김대락 사후에 ‘백하구려’라고 쓴 현액이 걸려 있다. 집의 이름인 ‘백하’는 ‘백두산 밑에 사는 사람’이라는 뜻으로, 만주로 망명한 후 붙은 호이다.

1차 수정

백하구려는 일제강점기 독립운동가인 백하 김대락(白下 金大洛, 1845~1914)이 고종 22년(1885)에 지은 집이다. 백하구려란 ‘백하의 옛 집’이라는 뜻이다.

김대락은 의성김씨 집성촌인 천전리 출신이다. 김대락의 가문은 ‘사람 천석, 글 천석, 살림 천석’이라 하여 ‘삼천석 집’으로 불릴 만큼 학문과 경제력을 모두 갖추었고, 명문가의 장남인 김대락은 평생 지역 사람들로부터 존경을 받았다. 1907년 안동 지역 최초의 근대식 중등 교육기관인 협동학교가 설립되자, 김대락은 나라의 장래를 위해 신학문이 필요하다는 점을 인식하였고 백하구려의 사랑채를 확장하여 교실로 사용하게 하였다.

1910년 일제에 국권을 빼앗기자 김대락은 집과 재산을 모두 처분한 후 일가친척 150여 명을 이끌고 만주로 망명하였다. 서간도 지역 최초의 한인 자치단체인 경학사 조직에 기여하였고, 신흥무관학교의 건립 자금을 대는 등 조국의 광복을 위해 힘썼으며, 이러한 공로를 인정받아 1990년에 건국훈장 애족장이 추서되었다.

현재 백하구려에는 김대락의 후손이 살고 있다. 안채, 좌우 날개채, 사랑채, 아래채로 구성되어 있으며, 안마당을 중심으로 ‘ㅁ’자형을 이루고 있다. 협동학교 교실로 사용하던 건물은 만주로 망명할 때 철거하였다고 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