토론:만세교리 태봉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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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20 국문

초고

조선 제21대 영조의 딸 화완옹주(1738~1808)의 태(胎)를 묻은 곳이다. 화완옹주는 영빈(暎嬪) 이씨가 낳았다. 사도세자의 친동생이며, 남편은 일성위(日城尉) 정치달이다. 영조는 화완옹주의 출산과 외손녀의 사망 소식에 화완옹주의 집을 직접 찾았을 정도로 옹주에 대한 애정이 남달랐다. 화완옹주는 돌도 지나지 않은 딸이 사망한지 한 달도 못 되어 남편도 사망하는 불운을 겪었다. 1775년(영조 51) 영조가 왕세손의 대리 청정을 결정하자 이를 반대하였고, 이 일로 인하여 정조가 즉위한 후 옹주의 작호를 박탈하였다.

태는 출산 후 배출되는 태반(胎盤)과 탯줄 모두를 말한다. 태를 좋은 땅에 묻으면 태의 주인이 지혜롭게 될 뿐만 아니라 병 없이 오래 살 수 있다고 믿었다. 특히 왕실에서는 높고 정결한 곳을 태를 묻기에 좋은 땅으로 여겨, 산봉우리 정상이 태실(胎室)을 만들 장소로 선택되었다. 태실을 만드는 과정은 이렇다. 먼저, 태봉으로 정해진 산의 정상에 흙구덩이를 판다. 이 안에 항아리 모양으로 다듬은 돌인 옹석(甕石)을 넣는다. 옹석 안에 태를 담은 태항아리와 태의 주인을 알 수 있도록 사각형의 작은 돌판인 태지석(胎誌石)을 넣는다. 뚜껑을 닫고 흙으로 덮어 마무리한다. 태실 앞에는 표석(標石)을 세웠다.

화완옹주 태실은 일제 강점기 전국의 태실이 훼손되는 과정에서 해체되었다. 현재 옹석은 땅에 그대로 묻혀있고, 옹석을 덮었던 개석(蓋石)은 훼손 당시의 모습을 보여주듯 방치되어 있다. 태실의 오른쪽에 서 있는 표석만이 원래 자리를 지키고 서 있다. 표석의 앞면에 새겨진 ‘乾隆三年正月二十九日丑時生翁主阿只氏胎室’이라는 기록을 통해 태의 주인이 1738년 1월 19일에 태어난 화완옹주임을 알 수 있다. 현재 태항아리는 도굴 당하여 자취를 알 수 없고, 태지석은 국립중앙박물관에 소장되어 있다. 18세기 왕실의 장태문화를 이해하는데 도움이 된다.

수정

조선 제21대 국왕 영조(1724~1776 재위)와 후궁 영빈 이씨의 딸 화완옹주(和緩翁主, 1738~1808)의 태(胎)를 묻은 곳이다. 태를 좋은 땅에 묻으면 태의 주인이 병 없이 오래 살 수 있다고 믿어, 왕실에서는 높고 정결한 곳에 태실(胎室)을 만들어 봉안하였다.

화완옹주는 사도세자의 친동생이며, 남편은 정치달(鄭致達, ?~1757)이다. 영조의 남다른 사랑을 받았지만, 돌도 지나지 않은 딸이 사망한 지 한 달도 못 되어 남편도 사망하는 불운을 겪었다. 영조 51년(1775) 왕세손의 대리 청정을 반대한 일로, 정조가 즉위한 후 옹주의 작호를 박탈하였다.

이 태실은 일제강점기 전국의 태실이 훼손되는 과정에서 해체되었다. 현재 태항아리를 넣었던 옹석(甕石)은 땅에 그대로 묻혀있고, 옹석을 덮었던 개석(蓋石)은 방치되어 있다. 태항아리는 도굴당하여 자취를 알 수 없고, 태지석은 국립중앙박물관에 소장되어 있다. 표석에는 ‘건륭 3년 정월 19일 축시생 옹주 아지씨 태실(乾隆三年正月十九日丑時生翁主阿只氏胎室)’이라 새겨져 있다. 18세기 왕실의 장태문화를 이해하는 데 도움이 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