토론:남해 화방사 산닥나무 자생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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기존 국문

이 곳의 산닥나무는 화방사(花芳寺) 입구의 왼쪽 언덕과 계곡을 따라 자라고 있다. 주변에 소나무가 드문드문 있고, 상수리나무, 신갈나무 등이 자라고 있는데, 소나무와 잡초 때문에 산닥나무가 점차 줄어 들고 있다. 산닥나무의 껍질과 뿌리의 섬유질은 종이의 원료로 사용한다. 우리나라에서는 매우 희귀한 나무로 주로 절 주변에서 많이 발견된다. 이는 조선시대에 종이 만드는 일이 대개 절에서 이루어졌기 때문인 것으로 보인다. 동국여지승람에 산닥나무를 일본에서 가져와 강화도, 진도, 완도, 남해도, 거제도, 창령 등지에 심었다고 기록되어 있는 사실로 보아 이 나무는 도래종 재배식물이 자생상을 이루게 된 것이라고 생각된다.

수정 국문

초고

산닥나무는 본래 ‘왜저(倭楮)’라고 불렀는데 이는 왜(倭)에서 들여온 닥나무이기 때문이다. 조선시대의 학자 유형원(柳馨遠, 1622~1673)의 『반계수록(磻溪隨錄)』에 따르면 우리나라 재래종의 닥나무보다는 일본에서 가지고 온 왜저가 종이의 질을 좋게 하므로 인조 때에 일본으로부터 종묘를 수입하였고, 이후로 남쪽 해안지방을 중심으로 재배되었다고 한다. 『문헌비고(文獻備考)』에도 남쪽 도서지대와 해안지대에 왜저가 많다고 하였으며, 『동국여지승람(東國輿地勝覽)』에는 경주·울산·고성·거제도·풍천 등에 산다고 기록되어 있다.

우리나라에서는 매우 희귀하여 보기 어려운데 현재는 이곳을 비롯한 남쪽 해안지방과 경기도 강화군 전등사 부근 산지에 자생지를 이루고 있다. 산닥나무의 자생지는 주로 절 주변에서 많이 발견된다. 이는 조선시대에 종이 만드는 일이 대개 절에서 이루어졌기 때문에 산닥나무도 주로 절 근처에 심어진 것으로 추측된다. 남해 산닥나무는 화방사(花芳寺)라는 절 입구의 왼쪽 언덕과 계곡을 따라 자라고 있다.

산닥나무는 팔꽃나무과에 딸린 낙엽성 떨기나무로 그 키가 보통 1m 정도까지 자라고, 잎은 부드러우며 마주나고, 뒷면이 다소 회록색을 띤다. 꽃은 7~8월경 가지 끝에 노란색으로 달린다. 남해 화방사 산닥나무 자생지는 우리나라에 있어서 그 수가 대단히 적은 산닥나무들이 제한된 지역에 분포하는 희귀성과 함께 우리나라에서 종이를 만드는 원료로 사용된 문화적 자료가 되므로 천연기념물로 지정하여 보호하고 있다.

1차 수정

산닥나무는 팥꽃나무과의 낙엽성 떨기나무로 한국과 일본에 분포한다. 키가 보통 1m 정도까지 자라고, 노란색의 꽃이 7~8월경에 피며, 9~10월경에 열매가 익는다. 껍질은 황갈색이고 뿌리는 굵은 편으로 황색이며 섬유질이 많아 고급 제지원료로 사용된다.

산닥나무는 본래 ‘왜(倭)에서 들여온 닥나무’라는 뜻의 ‘왜저(倭楮)’라고 불렸다. 조선시대의 학자 유형원(柳馨遠, 1622~1673)이 쓴 󰡔반계수록(磻溪隨錄)󰡕에 따르면 우리나라 재래종의 닥나무보다는 왜저로 만든 종이의 질이 좋았기 때문에, 종묘를 수입하여 남쪽 해안지방을 중심으로 재배하였다고 한다.

화방사의 산닥나무 자생지는 화방사 입구의 왼쪽 언덕과 계곡을 따라 해발 200~600m 범위에 분포하고 있다. 조선시대에는 종이를 만드는 일이 대개 불교 사찰에서 이루어졌기 때문에, 산닥나무를 주로 사찰 주변에 심었던 것으로 추측된다. 우리나라에서는 산닥나무가 극히 제한된 지역에 분포하여 희귀성이 있고, 사찰에서 종이를 제작하던 문화를 보여주는 자료로서의 가치가 있으므로 천연기념물로 지정하여 보호하고 있다.

  • 문화재로 지정된 면적이 9,917㎡에 달해 1962년 지정 당시에는 이 일대에 산닥나무가 널리 분포하고 있던 것으로 보인다. 하지만 지금은 다른 나무들과 잡초로 인해 그 수가 줄어들고 있다.

자문의견

  1. 분야별 자문위원 1
    • 기존 문안에 비해 많은 개선이 이루어졌으며 추가 수정할 부분을 찾지 못하였습니다.
  2. 분야별 자문위원 2
    • (떨기나무라는 표현보다는 관목이라는 표현을 많이 쓰고 있음) 낙엽성 떨기나무로→낙엽성 관목으로
  3. 읽기 쉬운 문안 자문위원
    • (이해하기 쉽게 문장 순서 변경, 종묘 단어 어렵고 삭제해도 무방하고‘왜 –일본’임을 모르는 이들을 위해 일본에서 수입으로 변경)
      화방사의 산닥나무 자생지는 화방사 입구의 왼쪽 언덕과 계곡을 따라 해발 200~600m 범위에 분포하고 있다.
      산닥나무는 키가 보통 1m 정도 자라는, 팥꽃나무과의 낙엽관목으로 7~8월경에 노란색의 꽃이 피고 9~10월경에 열매가 익는다. 껍질은 황갈색이고 뿌리는 굵은 편으로 황색이며 섬유질이 많아 고급 제지원료로 사용된다.
      산닥나무는 본래 왜(倭)에서 들여온 닥나무’라는 뜻의 ‘왜저(倭楮)’라고 불렸다. 조선시대의 학자 유형원(柳馨遠, 1622~1673)이 쓴 『반계수록(磻溪隨錄)』에 따르면 우리나라 재래종의 닥나무보다 왜저로 만든 종이의 질이 좋았기 때문에 일본에서 수입하여 남쪽 해안지방을 중심으로 재배하였다고 한다.
      조선시대에는 종이를 만드는 일이 대개 불교 사찰에서 이루어졌기 때문에, 산닥나무를 주로 사찰 주변에 심었던 것으로 추측된다. 우리나라에서는 산닥나무가 극히 제한된 지역에 분포하여 희귀성이 있고, 사찰에서 종이를 제작하던 문화를 보여주는 자료로서 가치가 있으므로 천연기념물로 지정하여 보호하고 있다.

2차 수정

산닥나무는 팥꽃나무과의 낙엽성 관목으로 키가 보통 1m 정도까지 자란다. 7~8월경에 노란색의 꽃이 피고 9~10월경에 열매가 익는다. 껍질은 황갈색이고 뿌리는 굵은 편으로 황색이며 섬유질이 많아 고급 제지원료로 사용된다.

산닥나무는 본래 ‘왜(倭)에서 들여온 닥나무’라는 뜻의 ‘왜저(倭楮)’라고 불렸다. 조선시대의 학자 유형원(柳馨遠, 1622~1673)이 쓴 󰡔반계수록(磻溪隨錄)󰡕에 따르면 우리나라 재래종의 닥나무보다 왜저로 만든 종이의 질이 좋았기 때문에, 일본에서 수입하여 남쪽 해안지방을 중심으로 재배하였다고 한다.

화방사의 산닥나무 자생지는 화방사 입구의 왼쪽 언덕과 계곡을 따라 해발 200~600m 범위에 분포하고 있다. 조선시대에는 종이를 만드는 일이 대개 불교 사찰에서 이루어졌기 때문에, 산닥나무를 주로 사찰 주변에 심었던 것으로 추측된다. 우리나라에서는 산닥나무가 극히 제한된 지역에 분포하여 희귀성이 있고, 사찰에서 종이를 제작하던 문화를 보여주는 자료로서 가치가 있으므로 천연기념물로 지정하여 보호하고 있다.

지자체 감수결과

산닥나무는 팥꽃나무과의 낙엽성 관목으로 키가 보통 1m 정도까지 자란다. 7~8월경에 노란색의 꽃이 피고 9~10월경에 열매가 익는다. 껍질은 황갈색이고 뿌리는 굵은 편으로 황색이며 섬유질이 많아 고급 제지원료로 사용된다.

산닥나무는 본래 ‘왜(倭)에서 들여온 닥나무’라는 뜻의 ‘왜저(倭楮)’라고 불렸다. 조선시대의 학자 유형원(柳馨遠, 1622~1673)이 쓴 󰡔반계수록(磻溪隨錄)󰡕에 따르면 우리나라 재래종의 닥나무보다 왜저로 만든 종이의 질이 좋았기 때문에, 일본에서 수입하여 남쪽 해안지방을 중심으로 재배하였다고 한다.

화방사의 산닥나무 자생지는 화방사 입구의 왼쪽 언덕과 계곡을 따라 해발 200~600m 정도의 범위에 자생하고 있다. 조선시대에는 종이를 만드는 일이 대개 불교 사찰에서 이루어졌기 때문에, 산닥나무를 주로 사찰 주변에 심었던 것으로 추측된다. 우리나라에서는 산닥나무가 극히 제한된 지역에 분포하는 희귀성을 띠며, 사찰에서 종이를 제작하던 문화를 보여주는 자료로서 가치가 높으므로 천연기념물로 지정하여 보호하고 있다.

공공언어 감수결과

화방사 산닥나무는 화방사 입구의 왼쪽 언덕과 계곡을 따라 해발 200m부터 600m 높이에 자생하고 있다. 산닥나무는 팥꽃나무과의 낙엽관목으로 키가 보통 1m 정도까지 자라며, 7~8월경에 노란색 꽃이 피고 9~10월경에 붉은 열매가 맺힌다. 비교적 굵은 황색의 뿌리에, 껍질은 황갈색으로 섬유질이 많아 종이의 고급 원료로 사용된다.

산닥나무의 이름은 본래 ‘왜, 즉 일본에서 들여온 닥나무’라는 뜻의 ‘왜저(倭楮)’였다. 조선 시대의 학자 유형원이 쓴 󰡔반계수록(磻溪隨錄)󰡕에 따르면 왜저로 만든 종이의 질이 좋았기 때문에 일본에서 수입한 후, 주로 남쪽 해안 지방에서 재배하였다고 한다.

화방사 산닥나무는 분포지역이 제한된 보기 드물고 귀한 나무인 점과 사찰에서 종이를 만들던 전통 문화를 보여주는 자료로서 가치를 인정받아 천연기념물로 지정하여 보호하고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