토론:남해 설흘산 봉수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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기존 국문

남해 설흘산 봉수대는 해발 490m의 설흘산 정상에 자연암반을 기반으로 하여 석축된 것으로 평면은 원형에 가까운 형태로 하단부는 각이 있다. 규모는 높이 6m, 직경 7m, 둘레 20m로 조성 되었으며 이 봉수는 남해금산 봉수를 받아 내륙의 망운산 순천 돌산도 봉수와 연결된 것으로 추정되며 조선시대 남쪽 해안방어와 관련된 관방시설로서 당시의 통신체제를 이해할 수 있는 중요한 학술자료로 인정되어 지난 2003년 6월 7일 경상남도 기념물 제 248호로 지정 되었으며 2007년 2월 봉수대 주변을 복원정비 오늘에 이르고 있다.

수정 국문

초고

봉수대는 횃불과 연기를 이용하여 급한 소식을 전하던 옛날의 통신수단으로 높은 산에 올라가서 불을 피워 낮에는 연기로 밤에는 불빛으로 신호를 보냈다.

경상남도 남해군 남면 홍현리의 설흘산(해발고도 약 490m) 꼭대기에 쌓은 봉수대이다. 『신증동국여지승람(新增東國輿地勝覽)』에는 ‘소흘산(所訖山) 봉수’라는 기록으로 남아 있으나 지금은 설흘산(雪屹山)으로 불린다. 이 봉수는 남해 금산 봉수를 받아 내륙의 망운산 순천 돌산도 봉수와 연결된 것으로 보이며 조선시대 때 남쪽 해안방어와 관련된 시설이다.

자연 암반을 기반으로 하여 석축하였으며 평면 형태는 원형이고 일부 각이 져 있다. 서벽은 붕괴가 심하여 후대에 일부 개축되었고 동쪽 부분은 비교적 잘 보존되어 있어 원래의 모습을 추정할 수 있다.

1차 수정

봉수대는 낮에는 연기(燧)로, 밤에는 횃불(烽)을 들어 정해진 신호를 보내는 근대 이전의 군사 통신시설이다.

조선시대에는 전국의 봉수망을 통해 중앙으로 정보가 전달되었다. 다섯 개의 직봉을 중심으로 직봉 사이에 간봉을 두기도 하였으며, 신호가 잘 보이도록 산봉우리의 시야가 트인 곳에 설치했다. 봉수는 평화로울 때 1개, 적이 나타나면 2개, 적이 경계에 접근하면 3개, 경계를 침범하면 4개, 경계에서 아군과 전투를 벌이면 5개의 신호를 올렸다. 이러한 제도는 1894년 근대통신수단이 도입될 때까지 사용되었다.

설흘산(해발 490m) 정상에 위치한 이 봉수대는 고려 중엽에 설치된 것으로 추정된다. 동래(오늘날의 부산)와 서울을 연결하는 간봉 제2거 노선에 속해있으며, 동쪽의 금산 봉수대에서 신호를 받아 내륙의 망운산 혹은 돌산도 봉수와 연결되는 것으로 보인다. 자연 암반에 돌로 쌓아 만들었는데, 동쪽 부분은 비교적 잘 보존되어 있고 서쪽 벽은 붕괴가 심하여 후대에 일부 개축되었다.

자문의견

  1. 분야별 자문위원 1
  2. 분야별 자문위원 2
    • 봉수대는 낮에는 연기(燧)로, 밤에는 횃불(烽)을 들어 정해진 신호를 보내는 군사 통신시설로 1894년 근대통신수단이 도입될 때까지 사용되었다.
      조선시대에는 전국의 봉수망을 통해 중앙으로 정보가 전달되었다. 다섯 개의 직봉 봉수 노선을 중심으로 사이에 간봉이란 보조 봉수 노선을 두기도 하였으며, 신호가 잘 보이도록 산봉우리의 시야가 트인 곳에 설치했다. 해안지역 봉수의 경우 평화로울 때 1개, 적이 나타나면 2개, 적이 해안의 일정한 경계를 침범하면 3개, 아군 함대와 교전하면 4개, 적이 상륙하면 5개의 신호를 올렸다.
      설흘산(해발 490m) 정상에 위치한 이 봉수대의 규모는 동서 길이 12m, 남북 길이 11m, 남아 있는 높이 4m 정도 규모이다. 위에서 바라보았을 때 연대의 형태는 9각형을 이루고 있으며 북동쪽으로는 연대로 올라가는 나선형의 계단이 설치되어 있다. 연대 북쪽 아래에는 위급 시 연대와 함께 5개의 신호를 하기 위한 것으로 추정되는 4개의 아궁이가 동서방향으로 배치되어 있다. 전체적으로 자연 암반에 돌로 쌓아 만들었는데, 동쪽 부분은 비교적 잘 보존되어 있으나 서쪽 벽은 붕괴가 심하며 후대에 일부 개축되었다.
      동래(오늘날의 부산)와 서울을 연결하는 간봉 제2거 노선 중 간봉에 속하여 처음 신호를 올리는 곳으로, 동쪽의 금산 봉수대에서 신호를 받아 북쪽의 원산봉수와 서쪽의 돌산도 봉수와 연락하였다. 『세종실록지리지(1454)』에서 처음 보이므로 조선전기 이전에 설치된 것으로 추정된다.
  3. 읽기 쉬운 문안 자문위원

2차 수정

봉수대는 낮에는 연기(燧)로, 밤에는 횃불(烽)을 들어 정해진 신호를 보내는 근대 이전의 군사 통신시설이다.

조선시대에는 전국의 봉수망을 통해 중앙으로 정보가 전달되었다. 다섯 개의 직봉 노선을 중심으로 그 사이에 간봉이라는 보조 노선을 두기도 하였으며, 신호가 잘 보이도록 주로 시야가 트인 높은 산봉우리에 봉수를 설치하였다. 봉수는 평화로울 때 1개, 적이 나타나면 2개, 적이 경계에 접근하면 3개, 경계를 침범하면 4개, 경계에서 아군과 전투를 벌이면 5개의 신호를 올렸다. 이러한 제도는 1894년 근대통신수단이 도입될 때까지 사용되었다.

설흘산(해발 490m) 정상에 위치한 이 봉수대는 고려 중엽에 설치된 것으로 추정된다. 동래(오늘날의 부산)와 서울을 연결하는 제2봉수 노선 중 간봉에 속해있으며, 동쪽의 금산 봉수대에서 신호를 받아 북쪽의 원산봉수, 서쪽의 돌산도봉수와 연락하였다. 자연 암반에 돌로 쌓아 만들었는데, 동쪽 부분은 비교적 잘 보존되어 있고 서쪽 벽은 붕괴가 심하여 후대에 일부 개축되었다.

지자체 감수결과

봉수대는 낮에는 연기(燧)로, 밤에는 횃불(烽)을 들어 정해진 신호를 보내는 근대 이전의 군사 통신시설이다.

조선시대에는 전국의 봉수망을 통해 중앙으로 정보가 전달되었다. 다섯 개의 직봉 노선을 중심으로 그 사이에 간봉이라는 보조 노선을 두기도 하였으며, 신호가 잘 보이도록 주로 시야가 트인 높은 산봉우리에 봉수를 설치하였다. 봉수는 평화로울 때 1개, 적이 나타나면 2개, 적이 경계에 접근하면 3개, 경계를 침범하면 4개, 경계에서 아군과 전투를 벌이면 5개의 신호를 올렸다. 이러한 제도는 1894년 근대통신수단이 도입될 때까지 사용되었다.

설흘산(해발 490m) 정상에 위치한 이 봉수대는 고려 중엽에 설치된 것으로 추정된다. 동래(오늘날의 부산)와 서울을 연결하는 제2봉수 노선 중 간봉에 속해있으며, 동쪽의 금산 봉수대에서 신호를 받아 북쪽의 원산봉수, 서쪽의 돌산도봉수와 연락하였다. 자연 암반에 돌로 쌓아 만들었는데, 동쪽 부분은 비교적 잘 보존되어 있고 서쪽 벽은 붕괴가 심하여 후대에 일부 개축되었다.

공공언어 감수결과

봉수대는 주변을 살피기 유리한 높은 산에 불을 피워 낮에는 연기로, 밤에는 횃불로 정해진 신호를 보내는 근대 이전의 군사 통신 시설이다.

설흘산(해발 490m) 정상에 있는 이 봉수대는 고려 중엽에 설치된 것으로 추정된다. 자연 암반에 돌을 쌓아 만들었는데, 동쪽 부분은 비교적 잘 보존되어 있으나 서쪽 벽은 붕괴가 심하여 후대에 일부 새로 고쳐 쌓았다.

동래(오늘날의 부산)와 서울을 연결하는 제2 봉수 노선 가운데 간봉*에 속한 봉수대로, 동쪽의 금산 봉수대에서 신호를 받아 북쪽의 원산 봉수, 서쪽의 돌산도 봉수와 연락하는 역할을 하였다.

  • 간봉(間烽): 조선 시대에 전국의 봉수망을 연결하는 주요 노선에 위치하고 있지 않은 작은 봉수 조직.