토론:남해 다정리 삼층석탑
목차
2021 안내문안 초안 작성 지원 사업
기존 국문
이 탑은 원래 신라의 원효대사(元曉大師)가 다천사(茶川寺)를 창건할 때 만들었다고 한다. 그러나 다천사의 내력에 대해서는 알려진 바가 없다. 다만 전해지는 말로는 다천사가 용문사(龍門寺)에 편입되고, 탑만 여기에 남았다고 한다. 탑의 뒤쪽에 석축이 약간 남아 있는 것으로 보아, 이 일대가 절터였을 것으로 추정되고 있다. 현재 탑은 받침대(基壇) 없이 두 개의 몸체(塔身)와 지붕돌(屋蓋石)만 남아 있지만, 원래의 형태는 3층이었을 것으로 추정된다. 받침돌과 나머지 탑의 부재(部材)들은 땅속에 묻혀있는 듯하다. 1층 몸체에는 모서리 기둥(隅柱)을 새겨 넣었고, 지붕돌은 약간의 경사를 두면서 살짝 들어올려 경쾌하게 처리했다. 지붕돌 위에는 몸체를 받치는 괴임이 있으며, 꼭대기에는 3개의 둥근 구슬(寶珠)이 있다. 탑의 전체적인 양식으로 보아 고려 시대에 제작되었을 가능성이 크다. 따라서 다천사 창건 당시 만들어졌다고 보기는 어렵다.
수정 국문
초고
이 석탑은 언제 만들어진 것인지 분명하지 않다.
현재 2층의 몸돌과 지붕돌이 확인되는데, 탑의 받침돌과 나머지 탑재들은 땅속에 묻혀있을 것으로 보이며, 따라서 처음에는 3층으로 세워졌던 것으로 추정하고 있다.
몸돌의 모서리마다 기둥 모양이 새겨져 있으며, 지붕돌은 3단의 받침을 두었다. 2층 지붕돌 위에는 머리 장식으로 추정되는 구슬 모양의 부재들이 있다.
전하는 이야기에 따르면, 신라 때의 고승 원효대사(元曉大師, 617-686)가 다천사(茶川寺)를 세울 때 이 탑을 만들었으며, 후에 다천사가 용문사(龍門寺)에 편입될 때 이 탑만 원래의 절터에 남았다고 한다.
그러나 다천사의 내력에 대해서는 알려진 바가 없고, 지붕돌의 두께가 두툼하고 3단의 받침을 두고 있는 점 등은 고려 때 만들어진 석탑의 특징에 가까워 고려 시대에 만들어진 것으로 추정하고 있다.
1차 수정
불탑은 부처의 유골을 모신 상징적인 조형물이다. 모든 탑이 진신사리를 모신 것은 아니지만, 부처를 모신 신성한 곳으로 여겨 신앙의 대상이 된다.
다정리의 이 석탑은 현재 몸돌 2개, 지붕돌 2개, 머리장식 일부만으로 이루어져 있지만, 원래는 3층 석탑으로 만들어졌을 것으로 추정된다. 몸돌의 모서리마다 기둥 모양이 새겨져 있으며, 지붕돌은 3단의 받침을 두었다. 2층 지붕돌 위에는 구슬 모양의 부재들이 있다.
전하는 이야기에 따르면, 이 탑은 신라의 고승 원효대사(元曉大師, 617~686)가 이곳에 다천사(茶川寺)라는 사찰을 세울 때 만들었다고 한다. 그러나 다천사의 내력에 대해서는 알려진 바가 없으며, 지붕돌이 두툼하고 3단의 받침을 두고 있는 등 탑의 전체적인 양식으로 보아 고려시대에 세운 것으로 추정된다.
자문의견
- 분야별 자문위원 1
- 불탑은 부처의 유골인 진신사리를 모시기 위해 만든 축조물이다. 부처의 무덤으로 신성시 여겨 오랫동안 예배공양의 대상으로 삼았다.
전하는 이야기에 따르면, 이 탑은 신라의 고승 원효대사(元曉大師, 617~686)가 세운 다천사(茶川寺)라는 절의 탑이라고 하지만 다천사의 내력에 대해서는 아직까지 확인된 바가 없다.
원래 3층 석탑으로 추정되며 받침돌은 없이 지금은 몸돌 2개와 지붕돌 2개, 머리장식 일부만 남아 있다. 몸돌은 네 모서리에 기둥을 조각하고, 지붕돌 밑면에 3개의 받침을 두었으며, 2층 지붕돌 위에는 원반 모양의 부재들이 놓여 있다.
지붕돌이 두툼하고 밑면의 받침 수가 줄어든 형태로 보아 고려시대에 만들어진 것으로 추정된다.
- 불탑은 부처의 유골인 진신사리를 모시기 위해 만든 축조물이다. 부처의 무덤으로 신성시 여겨 오랫동안 예배공양의 대상으로 삼았다.
- 분야별 자문위원 2
- 문안 첫 구절에서 석탑의 일반 정의 수정 필요.
‘부처의 유골’-> ‘부처의 유골의 일종인 사리’, ‘진신사리’-> ‘실제 석가모니의 사리’ - ‘구슬 모양의 부재’ -> ‘머리장식의 일부인 보주(구슬 모양의 부재)’가 남아 있다.
- 문안 첫 구절에서 석탑의 일반 정의 수정 필요.
- 읽기 쉬운 문안 자문위원
- (쉬운 문장으로 변경 & 부재라는 단어가 어렵고 혼선되는 정보를 간략하게 정리)
불탑은 부처의 유골을 모신 상징적인 조형물이다. 모든 탑이 진신사리를 모신 것은 아니지만, 부처를 모신 신성한 곳으로 여겨 신앙의 대상이 된다.
다정리의 이 석탑은 현재 몸돌 2개, 지붕돌 2개만 남아 2층 탑처럼 보이지만, 원래는 3층석탑이었을 것으로 추정된다. 몸돌의 모서리마다 기둥 모양이 새겨져 있고 지붕돌 밑면에는 3단의 받침을 두었으며, 꼭대기에는 3개의 구슬모양의 장식이 있다.
신라의 고승 원효대사(元曉大師, 617~686)가 이곳에 다천사(茶川寺)라는 사찰을 세울 때 만들었다고 전해지지만, 지붕돌이 두툼하고 3단의 받침을 두고 있는 등 탑의 전체적인 양식으로 보아 고려시대에 세운 것으로 추정된다.
- (쉬운 문장으로 변경 & 부재라는 단어가 어렵고 혼선되는 정보를 간략하게 정리)
2차 수정
불탑은 부처의 유골을 모신 상징적인 조형물이다. 모든 탑이 진신사리를 모신 것은 아니지만, 부처를 모신 신성한 곳으로 여겨 신앙의 대상이 된다.
전하는 이야기에 따르면, 다정리의 이 석탑은 신라의 고승 원효대사(元曉大師, 617~686)가 이곳에 다천사(茶川寺)라는 사찰을 세울 때 만들었다고 한다. 그러나 다천사의 내력에 대해서는 알려진 바가 없으며, 지붕돌이 두툼하고 3단의 받침을 두고 있는 등 탑의 전체적인 양식으로 보아 고려시대에 세운 것으로 추정된다.
이 탑은 현재 몸돌 2개, 지붕돌 2개, 머리장식 일부만으로 이루어져 2층 석탑처럼 보이지만, 원래는 3층 석탑이었을 것으로 추정된다. 몸돌의 모서리마다 기둥 모양이 새겨져 있으며, 지붕돌 밑면에는 3단의 받침을 두었다. 2층 지붕돌 위에는 머리장식의 일부인 구슬 모양의 부재가 남아 있다.
지자체 감수결과
불탑은 부처의 유골을 모신 상징적인 조형물이다. 모든 탑이 진신사리를 모신 것은 아니지만, 부처를 모신 신성한 곳으로 여겨 신앙의 대상이 된다.
전하는 이야기에 따르면, 다정리의 이 석탑은 신라의 고승 원효대사(元曉大師, 617~686)가 이곳에 다천사(茶川寺)라는 사찰을 세울 때 만들었다고 한다. 조선시대에 이르러 다천사보다 명지인 용문사에 합사함으로서 탑만이 남게 되었다고 한다. 이곳은 탑이 있다고 하여 탑골이라고 불려지다 다천으로 지명이 바뀌었는데, 탑이 섰던 들과 북쪽 들이 화정들 혹은 화정 등으로 불리우는 것으로 보아 화정사의 사지로도 추정되고 있다.
이 탑은 현재 몸돌 2개, 지붕돌 2개, 머리장식 일부가 남아 있으나, 본래는 3층 석탑이었을 것으로 추정된다. 몸돌의 모서리마다 기둥 모양이 새겨져 있고, 두툼한 지붕돌 밑면에는 3단의 받침을 두었다. 2층 지붕돌 위에는 머리장식의 일부인 구슬 모양의 부재가 남아 있다. 온전한 모습은 아니지만 형태적 특징으로 보아 고려시대 탑으로 추정된다.
공공언어 감수결과
탑은 부처의 진신사리를 모신 상징적인 조형물로, 탑파라고도 한다. 원래는 부처의 사리를 안치하기 위하여 흙이나 돌 등을 높게 쌓아올린 무덤으로, 모든 탑이 사리를 모신 것은 아니지만 부처를 모신 신성한 곳으로 여겨 신앙의 대상이 되고 있다.
다정리 삼층석탑은 신라의 고승 원효대사가 이곳에 다천사라는 사찰을 세울 때 만들었다고 전하는데, 형태적 특징으로 보아 고려 시대에 만들어진 탑일 가능성이 크다. 조선 시대에 이르러 다천사와 용문사를 합치면서 이곳에는 탑만 남게 되었다고 한다.
이 탑은 현재 몸돌 2개, 지붕돌 2개, 머리 장식 일부가 남아 있으나, 본래는 3층 석탑이었을 것으로 추정하고 있다. 몸돌의 모서리마다 기둥 모양이 새겨져 있고, 두툼한 지붕돌 밑면에는 3단의 받침이 있다. 2층 지붕돌 위에는 머리 장식의 일부인 구슬 모양의 재료가 남아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