토론:김해 분산성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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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20 안내문안 초안 작성 지원 사업

기존 국문

김해시내, 김해평야와 낙동강, 그리고 남해바다를 한눈에 조망할 수 있는 분산(盆山, 330m)의 정상부에 띠를 두르듯이 돌로 쌓은 테뫼식 산성이다. 현재는 시내쪽 경사면에서 약 900m 가량의 성벽이 남아 있고, 성 안에서는 몇 개의 건물터도 조사되었다.

성 안에 있는 3개의 비문과 신증동국여지승람에 따르면, 분산성은 고려 말에 김해부사 박위가 왜구의 침입에 대비해 옛 산성을 돌로 쌓았고, 조선 말 18세기에 김해부사 정현석이 고쳐 쌓았다 한다. 그러나 성 안에서는 가야, 신라의 토기편들도 출토되고, 분산성이 고대 산성의 주류였던 테뫼식 산성이란 점 등에서 신라나 가야시대까지 올라갈 수 있는 가능성도 있다.

김해시민들에게는 만장대(萬丈臺)라는 이름으로 친숙하다. 만장대는 조선시대에 대원군이 왜적을 물리치는 전진기지로 ‘만 길이나 되는 높은 대(臺)’라는 칭호를 내렸던 것에서 비롯되었다. 1999년에 복원된 봉수대 뒤편의 바위에는 만장대라 쓴 대원군의 친필과 도장이 새겨져 있다.

산성 안에는 해은사(海恩寺)가 있다. 해은사는 가락국의 허왕후가 바다에서 왔던 것을 기리는 뜻에서 세워졌다고 하며, 조선시대에 그려진 수로왕과 허왕후의 영정이 모셔져 있다. 임진왜란 때에는 이곳에 승벼어이 주둔하였다고 전한다.

수정 국문

초고

분산성은 돌을 이용해 분산(해발 327m) 꼭대기를 둘러쌓은 산성으로, 김해시 중앙에 자리하고 있다.

처음 쌓은 시기는 확실하지 않지만, 산성을 쌓은 모양 등을 고려하면 삼국시대에 쌓은 것으로 추정된다.

1375년 김해 부사로 부임한 박위가 왜구의 침입을 막기 위해 수리했고, 임진왜란 때 무너졌던 것을 1871년 부사 정현석이 다시 쌓았다는 기록이 정상부에 세워져있는 비석에 남아있다.

성은 서남부의 험준한 천연 암벽을 그대로 이용하는 등 지형적 조건을 활용하여 남북으로 긴 타원형을 이루도록 쌓았다. 성벽 바깥쪽에 벽을 지탱하는 계단 형태의 기단부가 있고, 성곽 위에는 높이가 낮은 담장을 쌓아 올렸다.

50m 가량밖에 남아있지 않았던 분산성의 성벽은 2000년부터 지속적인 복원 사업이 진행되어 현재의 모습을 갖추게 되었으며, 지금은 둘레 900m 가량의 성벽을 확인할 수 있다.

2019년 이루어진 발굴조사에서 성 안 서쪽의 집수지 6기가 확인되었고 중앙에서는 조선시대 초기에 세워졌던 것으로 추정되는 진아, 창(倉), 군기고 등 건물터 5동이 확인되었다.

이곳은 김해시내와 낙동강과 남해안이 한 눈에 내려다 볼 수 있고 날이 맑을 때는 부산까지 보일 정도로 사방으로 전망이 트여있어, 적의 움직임을 파악하는 전략적 요충지로 활용되었을 것으로 보인다.

성 안에는 봉수대와 사찰이 있다. 1999년 복원된 봉수대의 이름은 ‘만장대’로, 이는 조선 후기 흥선대원군이 왜적을 물리치는 전진기지로 '만 길이나 되는 높은 대(臺)'라는 칭호를 내렸던 것에서 비롯되었다고 한다. 근처 바위에 만장대라고 쓴 대원군의 친필과 도장이 새겨져 있다. 북문 인근에 위치한 해은사(海恩寺)는 가락국의 허왕후가 바다에서 왔던 것을 기리는 뜻에서 세워졌다고 한다. 조선 시대에 그려진 수로왕과 허왕후의 영정이 이곳에 모셔져 있다.

  • 성 안에 우물과 민가가 있다고 하고(문화재청 설명문안 중), 항공사진 상으로도 민가 모습이 보이기 때문에 다른 관련 기록 확인이 더 필요함. (현재 전문 확인 불가 자료 - 김해 분산성 : 김해 분산성 성곽하부 발굴조사(경상문화재연구원, 2019 ; 분산성 종합 정비계획(동서문화재연구원, 김해시, 2007) ; 盆山城 地表調査 報告書(김해시, 1999) ; 고대 성곽에서 역사를 만나다, 성순택 저, e퍼플 출판, 2019 등...)
  • 인근 유적지들의 존재나, 마현산성 등의 동일지역 산성과 비교해 가야에서 활용했다는 견해도 있음.
  • 전체 923m에 달했던 성벽은 1871년 이후 지금까지 허물어지지 않고 남은 것이 53여 m였으며, 이는 그대로 보존했다. 여기에 2000년부터 복원을 시작해 동문과 서문을 비롯한 성벽들 470여 m와 동문에서 남문까지 100여 m를 높이 5∼15m, 너비 3∼4m의 규모로 복원했으며, 2021년까지 300여 m의 추가 복원을 진행 중이다.
  • 정상부에는 2002년 개관한 천체투영실과 전망대를 갖춘 영남 유일의 천문대가 있고, 인근(북쪽)에 2008년 조성된 가야역사테마파크가 있다.
  • 2019년 이루어진 발굴조사에서 발견된 집수지 중 안쪽 3기는 조선시대에 만들어진 것으로 확인됐고 조사구간 밖으로 범위가 확장돼 내부조사를 실시하지 못한 4, 5호는 층위와 유물을 통해 삼국~통일신라시대 것으로 추정된다. 2호 집수지에서는 배모양 목기가 발견됐다.
  • 1998년 동아대학교박물관의 『문화유적분포지도-김해시』 제작을 위한 지표조사시 분산성에 대한 기초자료를 확보하였으며 이후 김해시의 분산성 복원사업 일환으로 실시된 1999년 경남고고학연구소의 지표조사와 서쪽 체성에 대한 시굴조사를 통해 분산성의 수축현황 및 성내 평탄지의 건물지 7동을 확인하였다. 그리고 2001년 경남문화재연구원의 북서쪽 체성에 대한 발굴(시굴)조사를 통해 초축체성의 성격 및 기단보축이 밝혀지게 되었으며 2004년에는 서암문지에 대해 경남문화재연구원에서 입회조사를 진행하였다. 상기의 조사결과들을 바탕으로 서쪽 및 북쪽 체성의 상당부분과 서암문지가 2000년부터 순차적으로 복원된 상태이다.

1차 수정

분산성은 분산(해발 327m) 꼭대기를 둘러쌓은 석성으로, 삼국시대에 쌓은 것으로 추정된다. 낙동강과 남해안이 한눈에 내려다보이는 등 사방으로 전망이 트여있어, 적의 움직임을 파악하는 전략적 요충지였을 것이다.

성은 서남부의 험준한 천연 암벽을 그대로 활용하여 남북으로 긴 타원형을 이루도록 쌓았다. 50m 가량 밖에 남아있지 않았던 분산성의 성벽은 2000년부터 지속적인 복원 사업이 진행되어 현재의 모습을 갖추게 되었으며, 지금은 둘레 900m 가량의 성벽을 확인할 수 있다.

2019년 발굴조사를 통해 성 안 서쪽의 집수지 6기가 확인되었고 중앙에서는 조선시대 초기에 세워졌던 것으로 추정되는 건물터 5동이 확인되었다.

성 안에는 봉수대와 사찰이 있다. 1999년 복원된 봉수대의 이름은 ‘만장대’로, 이는 조선 후기 흥선대원군이 왜적을 물리치는 전진기지로 '만 길이나 되는 높은 대(臺)'라는 칭호를 내렸던 것에서 비롯되었다고 한다. 북문 인근에 위치한 해은사(海恩寺)는 가락국의 허왕후가 바다에서 왔던 것을 기리는 뜻에서 세워졌다고 한다. 조선시대에 그려진 수로왕과 허왕후의 영정이 이곳에 모셔져 있다.

자문의견

  1. 분야별 자문위원 1
    • 분산성은 분산(해발 327m) 꼭대기를 →분산성은 분산(해발 327m) 정상부를
  2. 분야별 자문위원 2
    • 분산성은 분산(해발 327m) 정상부를 중심으로 둘레 약 900m의 돌로 둘러쌓은 성으로, 삼국시대부터 조선시대까지 사용되었다. 이곳에서는 낙동강과 남해안이 한눈에 내려다보이는 등 사방으로 전망이 트여있어, 침입하는 적의 움직임을 잘 파악할 수 있는 전략적 요충지이다.
    • 성 안에 있는 3개의 비문과 『신증동국여지승람(1530)』의 기록에 따르면, 분산성은 고려 말기에 김해부사 박위가 왜구의 침입에 대비해 옛 산성을 돌로 쌓았고, 조선 말기인 18세기에 김해부사 정현석이 고쳐 쌓았다 한다. 그러나 초축 성벽 바깥으로 기단보축이라는 성벽의 기단부를 보강하기 위한 삼각형의 석축이 덧대어져 있는 점과 성안에서 삼국시대까지 시기가 올라가는 토기나 기와조각, 그리고 청자나 백자조각도 확인되고 있고 삼국시대 처음 축조되어 조선시대까지 사용된 것으로 보고 있다.
    • 2000년부터 지속적인 복원 사업이 진행되어 현재의 모습을 갖추게 되었으며, 2019년 발굴조사를 통해 성안 서쪽에서 집수지 6기가 확인되었고, 정상의 남쪽 평탄지에서는 〈분산산성지도(1872년, 규장각 소장〉에서 보이는 건물터 5동이 확인되었다.
    • 북문 인근 정상부에 위치한 사찰 해은사(海恩寺)는 가락국의 허왕후가 바다에서 왔던 것을 기리는 뜻에서 세워졌다고 한다. 조선시대에 그려진 수로왕과 허왕후의 영정이 이곳에 모셔져 있다. 1999년 성안 남쪽 정상부에 복원된 봉수대는 조선후기 기록에서 보이는 산성봉수로서 남쪽 성화례산봉수에서 신호를 받아 북쪽 자암산봉수로 신호를 전달하였다. 봉수대 인근에는 ‘만장대’라고 새긴 큰 바위가 있는데, 이는 조선 후기 흥선대원군이 왜적을 물리치는 전진기지로 '만 길이나 되는 높은 대(臺)'라는 칭호를 내렸던 것에서 비롯되었다고 한다.
  3. 읽기쉬운문안 자문위원
    • 낙동강과 남해안이 한눈에 내려다보이는 등 사방으로 전망이 트여 있어, 적의 움직임을 파악하는 전략적 요충지로 활용된 것으로 보인다.
    • 50m 정도밖에 남아있지 않았던
    • 중앙에서는 조선시대 초기에 세워졌던 것으로 추정되는 건물터 5동이 발견되었다.

2차 수정

분산성은 분산(해발 327m) 정상부를 둘러쌓은 석성으로, 삼국시대에 처음 축조되어 조선시대까지 사용되었다. 이곳에서는 낙동강과 남해안이 한눈에 내려다보이는 등 사방으로 전망이 트여 있어, 적의 움직임을 파악하는 전략적 요충지로 활용된 것으로 보인다.

성의 둘레는 약 900m로 서남부의 험준한 천연 암벽을 그대로 활용하여 남북으로 긴 타원형을 이루도록 쌓았다. 50m 정도 밖에 남아있지 않았던 분산성의 성벽은 2000년부터 지속적인 복원 사업이 진행되어 현재의 모습을 갖추게 되었다.

2019년 발굴조사를 통해 성 안 서쪽에서 집수지 6기가 확인되었고, 남쪽 평탄지에서는 조선시대 초기에 세워졌던 것으로 추정되는 건물터 5동이 확인되었다.

성안 남쪽 정상부에는 1999년에 복원된 봉수대가 있다. 봉수대 인근에는 ‘만장대(萬丈臺)’라고 새긴 큰 바위가 있는데, 이는 조선 후기 흥선대원군이 왜적을 물리치는 전진기지로 '만 길이나 되는 높은 대'라는 칭호를 내렸던 것에서 비롯되었다고 한다. 북문 인근에 위치한 해은사(海恩寺)는 가락국의 허왕후가 바다에서 온 것을 기리는 뜻에서 세워졌다고 한다. 이곳에는 조선시대에 그려진 수로왕과 허왕후의 영정이 모셔져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