토론:김천 나화랑 생가
2022년 국문집필
기존 국문
기존 문안 없음.
수정 국문
초고
이 집은 한국 대중음악계를 대표하는 작곡가 나화랑(羅花郞, 1921~1983, 본명 조광환)이 태어나 자란 곳이다. 1921년에 지어졌으며, 안채, 사랑채, 창고 등 3동의 건물로 이루어져 있다.
나화랑은 ‘열아홉 순정’, ‘무너진 사랑탑’, ‘늴리리 맘보’등 500여 편의 가요를 작곡하였으며, 연주에 서양악기를 도입하거나 서양의 맘보, 블루스 등의 리듬을 우리 민요에 접목하는 새로운 편곡을 시도하였다. 또 레코드사를 직접 경영하면서 우리나라 최초의 민요 LP 음반을 비롯해 수많은 음반 제작을 주도하는 등 한국 대중음악의 보급과 발전에 공헌하였다.
나화랑과 비슷한 시대에 활동했던 다른 대중음악가들의 생가는 대부분 사라지거나 확인되지 않는 상황이기 때문에 이 집은 희소성과 상징성이 있으며, 음악사적 및 지역사적 측면에서도 보존 가치가 있다.
- 사랑채는 가운데에 대청이 있고 좌우에 온돌방을 두었으며, 건물 전면에는 툇마루를 달았다. 오른쪽에 있는 온돌방이 나화랑이 머물렀던 방이라고 한다. 안채는 툇마루 끝에 유리미닫이문을 설치했다.
- <김천 나화랑 생가 기록화조사보고서>가 2021년에 작성된 것으로 보이나 온라인으로 열람 불가 -> 집의 구조를 설명할 수 있는 자료 부족하므로 해당 보고서 확인할 수 있다면 좋을 듯.
- 나화랑은 바이올린 전공으로 일본 유학을 다녀온 뒤 1942년 가수로 먼저 데뷔했다가, 곧 작곡으로 활동 영역을 옮겼다. 광복 후에는 김천여자고등학교의 음악교사로 근무하였고, 한국전쟁 중에는 육군본부 군예대에서 악단장을 맡았고, 전쟁이 끝난 1954년에는 공군 정훈음악대에서 군가를 작곡하기도 했다. 1954년 킹스타레코드사에 입사하면서 예명을 얻고 작곡가로서의 활동을 시작하였다. 1956년에는 KBS 경음악단 상임지휘자를 맡았고, 1962년에는 라미라레코드사를 세워 직접 음반회사를 경영하기도 했다. 1975년에는 군가 ‘멸공의 횃불’을 작곡했다. 그의 형은 작사가 고려성(본명 조경환)이다. 대표곡은 ‘열아홉 순정’, ‘무너진 사랑탑’, ‘늴리리 맘보’등이다.
1차 수정
이 집은 작곡가 나화랑(羅花郞, 1921~1983, 본명 조광환)이 태어나 자란 곳이다. 1921년에 지어졌으며, 안채, 사랑채, 창고로 이루어져 있다. 나화랑 생가는 2020년 국가등록문화재로 등록되었으며, 한국의 대중문화인이 태어난 집이 국가등록문화재로 지정된 최초의 사례이다.
나화랑은 김천고등보통학교를 졸업하고 일본 동경의 중앙음악학원에서 바이올린을 전공하였다. 1940년 제1회 레코드예술상에서 입상하며 가수가 되었다가, 1942년 작곡가로 데뷔하였다. 해방 후에는 김천여자고등학교에서 음악 교사로 근무하였고, 한국전쟁 중에는 육군본부 군예대 악단장으로 활동하였다. 나화랑은 ‘열아홉 순정’, ‘무너진 사랑탑’, ‘늴리리 맘보’등 평생 500여 편 이상의 가요를 작곡하였다. 서양악기를 도입하거나 맘보, 블루스 등의 리듬을 우리 민요에 접목하는 새로운 편곡을 시도하였으며, 우리나라 최초의 민요 LP 음반을 비롯해 수많은 음반을 제작하는 등 한국 대중음악의 보급과 발전에 공헌하였다.
나화랑의 가족은 한국 대중문화사에서 손꼽히는 음악가족이기도 하다. 나화랑의 형은 작사가이자 가요 제작자인 고려성(高麗星, 1910~1956, 본명 조경환)이고, 나화랑의 아내 유성희(1939~2013) 역시 가수로 활동하였다. 나화랑과 유성희의 아들 조규천, 조규만, 조규찬 모두 가수 겸 작곡가이며 조트리오라는 이름으로 활동하기도 하였다.
나화랑과 비슷한 시대에 활동했던 다른 음악가들의 생가는 대부분 사라지거나 확인되지 않는 상황이다. 따라서 이 집은 희소성과 상징성이 있으며, 음악사적 및 지역사적 측면에서도 보존 가치가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