토론:길명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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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20 국문

초고

봉래 양사언(1517~1584) 선생의 위패와 영정을 모신 사당이다. 선생은 포천 출신 제일의 학자이고 조선 전기 4대 명필이며 대문장가이었다. 신북면 기지리에서 출생하였다. 1546년 문과에 급제한 후 안변 대도호부사를 역임하기까지 여덟 고을의 수령으로서 효제와 교화로 선정을 베풀어 곳곳마다 거사비(去思碑)가 세워졌다. 이 사당은 선생의 묘소 인근에다 1991년 6월에 준공하고 동리의 이름을 따 명명하였다. 청주양씨 문중과 유림의 발의로 성금과 도비, 시비 등의 보조로 건립되었다. 정면 3칸 측면 2칸이며, 맞배지붕이다. 좌우의 외벽 위에는 방풍판을 달았다. 정문은 삼문 구조로서, 정면 3칸 측면 2칸이며 솟을대문이다. 매년 음력 9월 16일에 지역 유림을 중심으로 제향을 받들고 있다.

수정

양사언(楊士彦, 1517~1584)의 위패와 영정을 봉안한 사당이다.

양사언은 포천 출신 제일의 학자이자 조선 전기 4대 명필이며 대문장가였다. 명종 원년(1546) 문과에 급제한 후 안변 대도호부사를 지내기까지 여덟 고을의 수령을 역임하였다. 효제와 교화로 선정을 베풀어 곳곳마다 거사비(去思碑)가 세워졌다. 그가 지은 ‘태산이 높다 하되 하늘 아래 뫼이로다’라는 시조는 교과서에 실릴 정도로 유명하다.

이 사당은 청주양씨 문중과 유림이 발의하고 성금과 도비, 시비 등의 보조로 1988~1991년에 건립되었다. 양사언의 묘소 인근에 있으며, 명칭은 ‘길명리’라는 동리의 이름을 따서 지었다. 매년 음력 9월 16일에 지역 유림을 중심으로 제향을 받들고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