토론:광양 중흥산성 삼층석탑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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기존 국문

이중 기단 위에 3층 탑신을 올린 신라 말기 삼층 석탑으로 조각과 장식이 화려하다. 몸체인 탑신석과 지붕돌인 옥개석이 각각 하나의 돌로 되어 있다. 각 층 탑신 네 귀에는 기둥이 굵직하게 표현되었고, 지붕돌 아래 옥개받침은 3단이며, 처마 밑은 수평으로 처리됐다. 1층 몸돌 각 면에는 연꽃 대좌 위에 앉은 여래상(如來像)을 조각하였다. 동서남북 어디에나 부처가 있음을 사방불(四方佛)을 통해 보여준다. 그 아래 기단은 한면을 둘씩 나눈 다음 앞면에는 인왕상(仁王像), 뒷면에는 보살상(菩薩像), 양 측면에는 사천왕상(四天王像)을 도드라지게 새겼다. 2,3층 몸돌은 급격히 작아지며 모서리 기둥만이 표현되었다. 탑신에 비해 밑의 기단부가 너무 커 보이는 경향이 있지만 매우 안정된 느낌을 주는 우수한 탑이다. 탑 꼭대기 상륜부는 모두 없어졌다. 원래 중흥산성 쌍사자 석등(국보 103호)과 함께 있었으나 석등은 국립광주박물관으로 자리를 옮겼다.

수정 국문

초고

불탑은 부처의 유골을 모신 상징적인 조형물이다. 모든 탑이 진신사리를 모신 것은 아니지만, 부처를 모신 신성한 곳으로 여겨 신앙의 대상이 된다.

이 삼층석탑은 통일신라 말인 9세기 무렵에 조성된 것으로 추정된다. 탑의 높이는 3.8m이다. 탑은 2층의 받침돌[기단], 3층의 몸돌과 지붕돌로 이루어져 있으며, 머리장식은 남아있지 않다.

2단의 기단 모두 모서리에 기둥을 표현하였으며, 기단 아래층에는 중앙에 3개의 기둥을 새겨 넣었다. 기단 위층에는 중앙에 기둥을 새겨 한 면에 2개의 화면을 만든 후, 각 면에 여러 존상들을 돋을새김으로 섬세하게 조각했다. 남쪽 정면에는 인왕상(仁王像)이, 반대편에는 찻잔을 받쳐 든 보살상(菩薩像)이 있고, 동서쪽에 해당하는 측면에는 무장을 한 사천왕상(四天王像)이 2위씩 배치되어 있다.

1층 몸돌 각 면에는 연화대좌 위에 있는 여래상을 조각했는데, 이는 동서남북 어디에나 부처가 있음을 의미하는 것이다. 북쪽의 여래상만 서 있고, 나머지는 앉아 있는 모습이다.

각 층 몸돌의 모서리에도 기둥 모양을 새겼으며, 지붕돌 아래에는 3단의 받침을 두었다.

석탑과 함께 경내에 있는 쌍사자 석등은 모사본이다. 원본[국보 제103호]은 1930년대 초 일본으로 반출될 위기에 처했다가 1937년 11월 경복궁으로 옮겨졌고, 그 후 덕수궁과 국립중앙박물관 등으로 옮겨졌다가 1990년 8월 국립광주박물관으로 이전하여 관리하고 있다.

  • 중흥사(中興寺)는 통일신라 시대의 고승 도선국사(道詵國師, 827-898)가 운암사(雲巖寺)라는 이름으로 창건했다고 전하는 사찰로, 임진왜란 당시 왜병과의 격전 끝에 불에 타 폐사되었다. 지역 독지가인 하태호(河泰鎬)의 후원으로 1963년 중창한 이후 지금의 모습을 갖추게 되었다.

1차 수정

불탑은 부처의 유골을 모신 상징적인 조형물이다. 모든 탑이 진신사리를 모신 것은 아니지만, 부처를 모신 신성한 곳으로 여겨 신앙의 대상이 된다.

중흥산성 삼층석탑은 통일신라시대 말기인 9세기 무렵에 조성된 것으로 추정된다. 중흥산성에는 신라 때 도선국사(道詵國師, 827~898)가 창건했다고 전하는 중흥사(中興寺)가 있었으나, 임진왜란 당시 왜병과의 격전 끝에 불에 타버렸다고 한다.

탑은 2단의 기단, 3층의 몸돌과 지붕돌로 이루어져 있으며, 머리장식은 남아있지 않다. 기단 모서리에는 기둥 모양을 새겼고, 아래층 기단에는 중앙에도 3개의 기둥을 새겨 넣었다. 위층 기단에는 중앙에 기둥을 새겨 한 면을 둘로 나눈 후, 인왕상, 보살상, 사천왕상 등을 돋을새김으로 섬세하게 조각했다. 1층 몸돌 각 면에는 연화대좌 위에 있는 여래상을 조각했는데, 이는 동서남북 어디에나 부처가 있음을 의미하는 것이다. 북쪽의 여래상만 서 있고, 나머지는 앉아 있는 모습이다. 각 층 몸돌의 모서리에도 기둥 모양을 새겼으며, 지붕돌 아래에는 3단의 받침을 두었다.

자문의견

  1. 분야별 자문위원 1
    • 불탑은 부처의 유골인 진신사리를 모시기 위해 만든 축조물이다. 부처의 무덤으로 신성시 여겨 오랫동안 예배공양의 대상으로 삼았다.
      이 탑은 신라 때 도선국사(道詵國師, 827~898)가 창건한 중흥사(中興寺)에 자리하고 있었는데 임진왜란 때 왜병과의 격전 끝에 절은 불에 타버렸다고 한다. 지금은 국립중앙박물관 소장인 중흥산성 쌍사자 석등(보물 제 103호)도 함께 있었던 것이다.
      탑의 구성은 상하 2층의 받침돌 위에 3개의 몸돌과 3개의 지붕돌, 머리장식으로 이루어져 있다. 맨 아래의 받침돌은 모서리 기둥과 가운데 3개의 버팀기둥을 조각했으며, 윗층 받침돌은 모서리 기둥과 가운데 굵은 버팀기둥을 조각해 면을 두 개로 나누었다. 면에는 팔부중을 조각하기도 하는데 이 탑은 인왕상, 공양상, 사천왕상을 돋을새김으로 조각했다. 윗옷을 입지 않은 인왕, 공양물을 받쳐 든 천부상과 무장의 옷을 입은 사천왕상이 섬세하다. 1층 몸돌에도 북쪽에 입상의 여래를 조각하고, 나머지는 연꽃 위에 앉은 여래상을 조각했다.
      1층 몸돌에 비해 2층 몸돌이 급격히 작아지고, 지붕돌의 밑면 받침은 3단씩이며 처마 밑은 수평을 이룬다. 각 부분에 조각이 풍부하지만 전체 탑의 규모에 비해 기단부가 큰 경향 등 전체적인 균형감이 줄어 통일신라 전성기 이후의 9세기 무렵에 제작된 것으로 추정된다.
  2. 분야별 자문위원 2
    • 문안 첫 구절에서 석탑의 일반 정의 수정 필요.
      ‘부처의 유골’-> ‘부처의 유골의 일종인 사리’, ‘진신사리’-> ‘실제 석가모니의 사리’
    • 기존 문안이 현재 국가문화유산포털의 내용과 다름(서울 국립중앙박물관X -> 현재 국립광주박물관). 현 내용 중 ‘이 탑은 원래 광양 중흥산성 쌍사자 석등(국보 제103호)과 함께 있었으나, 석등은 국립광주박물관으로 옮기고 석탑만이 남아 있다. ’ 부분 반영 필요.
    • 국립문화재연구소, 『전라남도의석탑Ⅲ』, 2006. 참조하여 일제강점기 반출시도와 복구과정 기술 필요.
    • 기단부 조각 기술 수정 필요. ‘보살상’ -> ‘공양상’
  3. 읽기 쉬운 문안 자문위원

2차 수정

불탑은 부처의 유골을 모신 상징적인 조형물이다. 모든 탑이 진신사리를 모신 것은 아니지만, 부처를 모신 신성한 곳으로 여겨 신앙의 대상이 된다.

중흥산성 삼층석탑은 통일신라시대 말기인 9세기 무렵에 조성된 것으로 추정된다. 중흥산성에는 신라 때 도선국사(道詵國師, 827~898)가 창건했다고 전하는 중흥사(中興寺)가 있었으나, 임진왜란 당시 왜병과의 격전 끝에 불에 타버렸다고 한다. 원래 쌍사자 석등(국보 제103호)과 함께 있었으나, 석등은 현재 국립광주박물관에 있다.

탑은 2단의 기단, 3층의 몸돌과 지붕돌로 이루어져 있으며, 머리장식은 남아있지 않다. 기단 모서리에는 기둥 모양을 새겼고, 아래층 기단에는 중앙에도 3개의 기둥을 새겨 넣었다. 위층 기단에는 중앙에 기둥을 새겨 한 면을 둘로 나눈 후, 인왕상, 공양상, 사천왕상 등을 돋을새김으로 섬세하게 조각했다. 1층 몸돌 각 면에는 연화대좌 위에 있는 여래상을 조각했는데, 이는 동서남북 어디에나 부처가 있음을 의미하는 것이다. 북쪽의 여래상만 서 있고, 나머지는 앉아 있는 모습이다. 각 층 몸돌의 모서리에도 기둥 모양을 새겼으며, 지붕돌 아래에는 3단의 받침을 두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