토론:광양 신재 최산두 선생 유허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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기존 국문

기묘명현(己卯名賢)이자 호남의 대학자인 신재 최산두(1482~1536)를 기리기 위해 세운 비석이다. 기묘명현은 조선 중종 때인 1519년 기묘사화가 일어나면서 조광조 등과 함께 화를 입은 사림을 가리키는 말이다. 37세 최산두는 화순 동복으로 유배됐다. 점필재 김종직과 한훤당 김굉필의 학맥을 이어받은 그는 유배지로 찾아온 많은 학자들과 교유했다. 하서 김인후와 미암 유희춘 등 당대 호남 거유들이 그에게 사사했다. 최산두는 유배지의 깎아지른 듯한 절벽을 보고 중국의 적벽(赤壁)에 버금간다 하여 ‘적벽’이라는 이름을 붙였다. 그는 15년 만에 유배에서 풀려난 뒤 곧 눈을 감았고, 1578년 이곳에 봉양사(鳳陽祠)가 세워지면서 광양현감을 지낸 박세후와 함께 배향되었다. 유허비는 1775년 봉양사 입구에 세워졌다. 순천부사인 김약행이 그의 행적과 봉양사 연혁, 조광조 등 신진사류들과의 교류에 대해 기록했다. 그의 행적과 조선 사람의 형성과 역사적 성격, 지역문화 등을 이해하는 데 중요한 사료이다.

수정 국문

초고

유허비는 선인들의 자취가 남아 있는 곳에 그들을 기리기 위하여 세운 비를 말한다.

신재 최산두선생 유허비는 기묘명현[1](己卯名賢)이자 호남의 대학자인 신재 최산두(1482~1536)를 기리기 위해 1775(영조 51)년, 봉양사(鳳陽祠) 입구에 건립되었다. 비는 머릿돌(가첨석, 加檐石) 없이 비의 몸체(비신, 碑身)와 대좌(臺座)로 이루어져 있으며, 비문은 순천부사를 지낸 김약행(金若行)이 지었다. 비문에는 최산두의 행적과 봉양사 연혁, 조광조 등 당대 신진사류들과의 교류에 대해 기록하고 있는데, 그의 행적과 조선 사림의 형성과 역사적 성격, 지역문화 등을 이해하는 데 중요한 사료가 된다.

최산두는 조광조(趙光祖)·김정(金淨)·김안국(金安國) 등과 교유하여 당시 사람들이 ‘낙중군자(洛中君子)’라 하였다. 1519년 기묘사화가 일어나면서 조광조 등과 함께 화를 입고, 37세 화순 동복으로 유배되었다. 점필재 김종직(金宗直)과 한훤당 김굉필(金宏弼)의 학맥을 이어받은 그는 유배지로 찾아온 많은 학자들과 교유하였으며, 하서 김인후와 미암 유희춘 등 당대 호남 거유들이 그에게 사사했다. 최산두는 유배지였던 동복의 도원서원(道源書院)에 제향되었다.

  • 기존 국문 안내판에 최산두 생년이 1482로 되어있는데, 민백에는 1483으로 되어있어 확인이 필요할 것 같습니다.

  1. 조선 중종 때인 1519년 기묘사화가 일어나면서 조광조 등과 함께 화를 입은 사림을 가리키는 말이다.

1차 수정

유허비는 선인들의 자취가 남아있는 곳에 그들을 기리기 위하여 세운 비를 말한다.

신재 최산두 선생 유허비는 조선시대의 문신이자 호남의 대학자인 최산두(崔山斗, 1483~1536)를 기리기 위해 영조 51년(1775)에 건립되었다. 유허비가 위치한 봉양사(鳳陽祠)는 광양현감을 지낸 박세후(朴世煦, 1494~1550)와 최산두를 모신 사당으로 선조 11년(1578)에 세워졌다.

광양 출신인 최산두는 중종 8년(1513) 과거에 급제한 뒤 여러 관직을 지냈다. 덕행과 문장으로 이름을 떨쳐 여러 문인들이 찾아와 수학하였으나, 1519년 기묘사화가 일어나면서 동복(오늘날의 화순 지역)으로 유배되었다. 유배지에서도 그를 찾아온 많은 학자들과 교유하였으며, 김인후(金麟厚, 1510~1560)와 유희춘(柳希春, 1513~1577) 등 당대 호남의 이름난 학자들이 그를 스승으로 섬겼다.

비는 받침돌과 몸돌로 이루어져 있으며, 비문은 당시 순천부사였던 김약행(金若行, 1718~?)이 지었다. 비문에는 최산두의 행적과 봉양사 연혁, 당대 신진사류들과의 교류에 대해 기록하고 있으며, 조선 사림의 형성과 역사적 성격, 지역문화 등을 이해하는 데 중요한 사료가 된다.

자문의견

  1. 분야별 자문위원 1
    • 학자들과 교유하였으며 → 학자들과 학문을 강론하였으며
  2. 분야별 자문위원 2
    • 신재 최산두 선생 유허비는 조선시대 문신이자 호남을 대표하는 학자인 최산두(崔山斗, 1483~1536)를 기리기 위해 1775년(영조 51)에 건립된 것이다. 유허비가 위치한 봉양사(鳳陽祠)는 광양현감을 지낸 박세후(朴世煦, 1494~1550)와 최산두를 모신 사당으로 1578년(선조 11)에 세워졌다.
      광양 출신 최산두는 1513년(중종 8) 과거에 급제한 이후 여러 관직을 지냈다. 덕행과 문장으로 이름을 떨쳐 많은 제자를 양성하였으며, 1519년(중종 14) 기묘사화에 연루되어 동복(현재 화순 지역)으로 유배되었다. 유배지에서도 많은 학자들과 교유하였는데, 김인후(金麟厚, 1510~1560)와 유희춘(柳希春, 1513~1577) 등 호남의 이름난 학자들이 그를 스승으로 모셨다.
      비는 받침돌과 몸돌로 이루어져 있으며, 비문은 당시 순천부사였던 김약행(金若行, 1718~?)이 지었다. 비문에는 최산두의 행적과 봉양사 연혁, 당대 신진사류들과의 교유 사실이 기록되어 있어, 조선 중기 사림의 형성과 역사적 성격, 지역 문화의 특성 등을 이해하는 데 중요한 자료가 된다.
  3. 읽기 쉬운 문안 자문위원
    • 유허비는 선인들의 자취가 남아있는 곳에 그들의 삶을 기리기 위하여 세운 비를 말한다.
      신재 최산두 선생 유허비는 조선시대의 문신이자 호남의 대학자인 최산두(崔山斗, 1483~1536)의 학문과 절의를 기리기 위해 영조 51년(1775)에 건립되었다. 유허비가 위치한 봉양사(鳳陽祠)는 광양현감을 지낸 박세후(朴世煦, 1494~1550)와 최산두의 위패를 모신 사당으로 선조 11년(1578)에 세워졌다.
    • 비석은 받침돌과 몸돌로 이루어져 있으며, 비문은 당시 순천부사였던 김약행(金若行, 1718~?)이 지었다. 비문에는 최산두의 행적과 봉양사 연혁, 당대 신진사류들과의 교류에 대해 기록하고 있으며, 조선 사림의 형성과 역사적 성격, 지역문화 등을 이해하는 데 중요한 역사 자료가 된다.

2차 수정

유허비는 선인들의 자취가 남아있는 곳에 그들의 삶을 기리기 위하여 세운 비를 말한다.

신재 최산두 선생 유허비는 조선시대의 문신이자 호남을 대표하는 학자인 최산두(崔山斗, 1483~1536)를 기리기 위해 영조 51년(1775)에 건립되었다. 유허비가 위치한 봉양사(鳳陽祠)는 광양현감을 지낸 박세후(朴世煦, 1494~1550)와 최산두의 위패를 모신 사당으로 선조 11년(1578)에 세워졌다.

광양 출신인 최산두는 중종 8년(1513) 과거에 급제한 뒤 여러 관직을 지냈다. 덕행과 문장으로 이름을 떨쳐 많은 제자를 양성하였으나, 중종 14년(1519) 기묘사화에 연루되어 동복(오늘날의 화순 지역)으로 유배되었다. 유배지에서도 많은 학자들과 교유하였으며, 김인후(金麟厚, 1510~1560)와 유희춘(柳希春, 1513~1577) 등 호남의 이름난 학자들이 그를 스승으로 모셨다.

비석은 받침돌과 몸돌로 이루어져 있으며, 비문은 당시 순천부사였던 김약행(金若行, 1718~?)이 지었다. 비문에는 최산두의 행적과 봉양사 연혁, 당대 신진사류들과의 교유 사실이 기록되어 있어, 조선 중기 사림의 형성과 역사적 성격, 지역문화의 특성 등을 이해하는 데 중요한 자료가 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