토론:광양 송천사지 회은장노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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기존 국문
조선 중기 승려 회은장로(1587~1672)를 기리는 비문이다. 회은장로의 출생과 출가 후 활동 상황을 기록하고 있다. 회은장로의 성은 기씨, 이름은 응준, 호는 회은이다. 어려서 출가하여 승려 생활을 했고, 병자호란 때 승병으로 활약하다가 후에 승병 대장이 되었다. 송천사 터에 있는 비는 받침을 위에 높이 2.92m의 비산을 세우고 머릿돌을 올린 모습니다. 머릿돌 밑면에는 용 두 마리가 여의주를 가운데 두고 다투는 장면이 조각돼 있다. 뒷면에는 용을 비롯하여 게, 개구리, 자라 등 여러 동물이 섬세하게 표현되어 있다. 비신 상단에는 ‘회은장로비명(悔隱長老碑銘)’ 이라 쓰여 있다. 비문에는 순찰사와 광양현감이 송천사 승려들과 함께 숙종 3년(1677)에 세웠다고 적고 있다. 회은장로가 입적한 5년 뒤이다. 불교를 억누르던 당시에 승려를 ‘장로’라 부르고, 관리들이 앞장서서 비를 세운 보기 드문 일이었다. 비의 이름을 법명이 아니라 호를 쓴 점도 승려보다 승병 대장으로 활약이 두드러졌기 때문으로 보인다.
수정 국문
초고
이 비석은 병자호란(1636) 때 승병으로 활약했던 조선시대의 승려 응준(應俊, 1587-1672)을 기리기 위해 세운 것이다.
응준은 15세에 출가했으며, 회은(悔隱)은 그의 호이다. 그는 병자호란이 일어나자 스승이었던 벽암(碧巖, 1575-1660)을 따라 승병군에 합류해 전투에 참여하였으며, 남한산성에서도 공을 세워 현종 원년(1660)에는 승병 대장까지 오르게 되었다.
비석은 숙종 3년(1677)에 당시 전라도 순찰사였던 박신규(朴信圭, 1631-1687)와 광양 현감이었던 안시익(安時翊, 1630-?)이 송천사의 승려들과 함께 세웠다. 비문은 시문에 능했던 승려 백곡처능(白谷處能, 1619-1680)이 지었고, 글씨는 종친인 낭성군 이우(朗善君 李俁, 1637-1693)가 썼다.
사각형의 받침돌 위에 몸돌을 세우고, 그 위에 머릿돌을 올린 형태이다. 머릿돌의 앞면은 두 마리의 용으로 장식했고, 뒷면에는 개구리와 자라, 게 등 다양한 동물을 섬세하게 조각했다. 몸돌의 크기는 높이 185cm, 폭 76.2cm이다. 비문은 회은의 출생, 출가 후의 행장과 승장으로서의 활동, 그리고 그의 법손들이 그를 기념하는 비를 세우게 된 사실 등을 기록하고 있다. 비의 뒷면에는 비석의 건립에 참여한 사람들의 명단을 기록했다.
불교를 억누르던 당시 승려를 ‘장로’라 칭하며 그의 덕을 높이 평가하고, 관리들이 앞장서서 비를 세운 것은 보기 드문 일이었다. 비의 이름에 법명이 아닌 호를 쓴 것도 승병으로 활약한 그의 행적을 부각하기 위해서로 보인다.
- 비석이 자리한 곳은 통일신라 시대의 고승 도선국사(道詵國師, 827-898)가 창건했다고 전하는 송천사(松川寺)의 옛 터이다. 송천사는 18세기 후반에 폐사되었다가 19세기에 중창되었으나, 이념 대립으로 혼란했던 1950년대에 다시 폐사되어 지금에 이른 것으로 보이며, 비석에 남아 있는 총탄의 흔적도 이 때 생긴 것으로 추정된다.
1차 수정
송천사지 회은장로비는 병자호란 때 승병으로 활약했던 승려 응준(應俊, 1587~1672)을 기리기 위해 숙종 3년(1677)에 세운 것이다. 회은(悔隱)은 응준의 호이고, 장로는 불교에서 지혜와 덕망이 높고 나이가 많은 고승을 높여 부르는 말이다.
응준은 15세에 출가하였으며, 병자호란이 일어나자 스승인 벽암(碧巖, 1575~1660)을 따라 승병군에 합류하였다. 남한산성에서 공을 세워 현종 원년(1660)에는 승병 대장까지 오르게 되었다. 당시 전라도순찰사였던 박신규(朴信圭, 1631~1687)와 광양현감이었던 안시익(安時翊, 1630~?)이 송천사의 승려들과 함께 회은장로비를 세웠다. 조선시대의 지방관들이 승려의 비를 건립하는 데 앞장선 것은 매우 드문 일이다.
이 비는 사각형의 받침돌, 몸돌, 머릿돌로 이루어져 있다. 머릿돌의 앞면은 두 마리의 용을 새겨 장식했고, 뒷면에는 개구리, 자라, 게 등 다양한 동물을 섬세하게 조각했다. 비문은 시문에 능했던 승려 백곡처능(白谷處能, 1619~1680)이 지었고, 글씨는 종친이자 서화가인 낭선군 이우(朗善君 李俁, 1637~1693)가 썼다. 비문은 회은의 출생, 출가 후의 행적, 승장으로서의 활동, 이 비를 세우게 된 사실 등을 기록하고 있으며, 비의 뒷면에는 비석의 건립에 참여한 사람들의 명단을 기록했다.
자문의견
- 분야별 자문위원 1
- 문화재명:광양 송천사지 회은장로비
- 적절합니다.
- 분야별 자문위원 2
- 문화재명:광양 송천사지 회은장로비
- 송천사지 회은장로비는 병자호란 당시 승병으로 활약했던 승려 응준(應俊, 1587~1672)을 기리기 위해 1677년(숙종 3)에 세운 것이다. 회은(悔隱)은 응준의 호이고, 장로는 불교에서 지혜와 덕망이 높고 나이가 많은 고승을 높여 부르는 말이다.
응준은 15세에 출가하였으며, 병자호란이 일어나자 스승 벽암(碧巖, 1575~1660)을 따라 승병군에 합류하였다. 남한산성에서 공을 세워 1660년(현종 원년) 승병장으로 활동하였다. 당시 전라도 순찰사 박신규(朴信圭, 1631~1687)와 광양 현감 안시익(安時翊, 1630~?)이 송천사 승려들과 함께 비를 세웠다. 유교국가인 조선시대에 지방관이 승려의 비를 건립하는 데 앞장선 매우 드문 사례이다.
비는 사각형의 받침돌과 몸돌, 머릿돌로 이루어져 있다. 머릿돌의 앞면은 두 마리의 용을 새겨 장식했고, 뒷면에는 개구리, 자라, 게 등 다양한 동물을 섬세하게 조각했다. 비문은 시문에 능했던 승려 백곡처능(白谷處能, 1619~1680)이 지었고, 글씨는 종친이자 서화가인 낭선군 이우(朗善君 李俁, 1637~1693)가 썼다. 비문에 회은의 출생, 출가 후의 행적, 승장으로서의 활동, 비 건립 사실 등이 기록되어 있으며, 뒷면에는 비석 건립에 참여한 사람들의 이름이 기록되어 있다.
- 읽기 쉬운 문안 자문위원
- 문화재명:광양 송천사지 회은장로비
- 응준은 15세에 출가하였으며, 병자호란이 일어나자 스승인 벽암(碧巖, 1575~1660)을 따라 승병군에 합류하였다. ⇒ 회은은 15세에 출가하였으며, 병자호란이 일어나자 스승인 벽암(碧巖, 1575~1660)을 따라 승병군에 합류하였다.
2차 수정
송천사지 회은장로비는 병자호란 때 승병으로 활약했던 승려 응준(應俊, 1587~1672)을 기리기 위해 숙종 3년(1677)에 세운 것이다. 회은(悔隱)은 응준의 호이고, 장로는 불교에서 지혜와 덕망이 높고 나이가 많은 고승을 높여 부르는 말이다.
응준은 15세에 출가하였으며, 병자호란이 일어나자 스승인 벽암(碧巖, 1575~1660)을 따라 승병군에 합류하였다. 남한산성에서 공을 세워 현종 원년(1660)에는 승병장으로 활동하였다. 당시 전라도순찰사 박신규(朴信圭, 1631~1687)와 광양현감 안시익(安時翊, 1630~?)이 송천사의 승려들과 함께 비를 세웠다. 조선시대의 지방관들이 승려의 비를 건립하는 데 앞장선 매우 드문 사례이다.
이 비는 사각형의 받침돌, 몸돌, 머릿돌로 이루어져 있다. 머릿돌의 앞면은 두 마리의 용을 새겨 장식했고, 뒷면에는 개구리, 자라, 게 등 다양한 동물을 섬세하게 조각했다. 비문은 시문에 능했던 승려 백곡처능(白谷處能, 1619~1680)이 지었고, 글씨는 종친이자 서화가인 낭선군 이우(朗善君 李俁, 1637~1693)가 썼다. 비문에는 회은의 출생, 출가 후의 행적, 승장으로서의 활동, 비를 세우게 된 사실 등이 기록되어 있으며, 뒷면에는 비석의 건립에 참여한 사람들의 명단이 기록되어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