토론:광산김씨 재사 및 사당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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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20 한중연 안내문안 작성

기존 국문

이 건물은 광산김씨 김효로(金孝盧, 1454~1534)를 모시기 위하여 중종 31년(1536)에 손자 김부필(金富弼)이 후손들과 함께 사당을 세우고 제향하였으며 후에 근시재(近始齋) 김해(金亥, 1555~1593)을 추향하였다. 김부필는 여러 차례 나라에서 참봉 벼슬을 주었으나 거절하였다.

재사는 정면 4칸, 측면 1칸 ‘一’자형으로 안마당이 있다. 사당은 정면 1칸, 측면 1칸의 맞배집이다. 1972년 안동댐 건설로 인하여 후조당(後彫堂), 탁청정(濯淸亭)과 함께 현재의 위치로 옮겨졌다.

수정 국문

초고

이 건물은 광산김씨 가운데 오천리에 처음 들어온 조상인 김효로(金孝盧, 1454~1534)의 묘를 지키고 제사를 지내기 위해 건립한 재사와 신주를 모신 사당이다.

1536년 손자 김부필(金富弼, 1516~1577)이 후손들과 함께 건립하였다.

김효로는 벼슬에 뜻이 없어 초야에 묻혀 학문을 닦으며 유유자적하게 지냈다. 학행이 뛰어나기로 유명해서 이 지역의 관찰사였던 김안국(金安國)에게 천거되었다. 죽은 뒤에는 이황의 조부인 이계양(李繼陽)과 함께 향현사(鄕賢祠)에 제향되었다.

이후 김효로의 증손자인 김해(金垓, 1555~1593)도 사당에 함께 모시고 제사를 지냈다. 김해는 학문이 뛰어나 문과에 급제하고 한림에 추천된 인재였다. 임진왜란이 발생하자 영남 지역의 의병대장으로 활약하다가 순국하였다.

이 집은 재사가 ‘ㅡ’자형 건물 2개가 앞뒤로 있고 그 사이에 창고로 쓰는 건물이 하나가 있다. 사당은 별도로 하나의 건물이다.

본래 오천리 낙동강 근처에 있었는데 1975년 안동댐 건설로 인해 현재의 위치로 옮겼다.

1차 수정

이곳은 광산김씨 가운데 오천리에 처음 들어온 조상인 김효로(金孝盧, 1454~1534)의 묘를 지키고 제사를 지내기 위해 건립한 재사와 신주를 모신 사당이다. 1536년 손자 김부필(金富弼, 1516~1577)이 후손들과 함께 건립하였다.

김부필의 스승이었던 이황(1502~1570)이 김효로의 묘비명을 직접 써주었는데, 그에 따르면 김효로는 ‘과거시험에 매이지 않고 깨끗하고 바른 품행으로 스스로 학문을 닦으며, 정성을 다하여 제사를 받들고, 부모에 대한 효도와 형제에 대한 우애로 자손을 가르쳤다’고 한다.

이후 김효로의 증손자인 김해(金垓, 1555~1593)도 사당에 함께 모시고 제사를 지냈다. 김해는 학문이 뛰어나 문과에 급제하고 한림에 추천된 인재였다. 임진왜란이 발생하자 영남 지역의 의병대장으로 활약하다가 순국하였다.

재사는 원래 예안면 오천리 낙동강 근처에 있었는데 안동댐을 건설하면서 1975년에 현재의 위치로 옮겼다. ‘ㅡ’자형 건물 2개가 안마당을 사이에 두고 앞뒤로 배치되어 있고, 안마당 오른쪽에는 창고로 쓰는 건물이 하나 더 있다. 사당은 재사 뒤편 왼쪽에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