토론:고흥 김붕만 신위단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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기존 국문

신위단비는 1914년에 건립한 석비로 비문을 통하여 김붕만의 행적과 후대의 추숭(追崇)에 대한 내용을 알 수 있다. 선무원종공신녹권이 국가 차원의 선현 추숭이라면, 신위단비는 향토와 지역 문중 차원의 추숭 활동을 알 수 있는 기록유산으로 역사적, 학술적가치가 있다.

수정 국문

초고

신위단비는 1914년에 건립한 석비로 비문을 통하여 김붕만의 행적과 후대의 추숭(追崇)에 대한 내용을 알 수 있다. 선무원종공신녹권이 국가 차원의 선현 추숭이라면, 신위단비는 향토와 지역 문중 차원의 추숭 활동을 알 수 있는 기록유산으로 역사적, 학술적가치가 있다.

김붕만(? ~ ?)은 고흥 출생으로 자(字)는 봉서(鳳瑞), 본관은 김해(金海), 판서(判書) 태덕(台德)의 후손이다. 좌찬성(左贊成) 연(璉)의 6세손, 금녕군 목경(牧卿)의 10세손으로 부친은 황(璜)이다. 외조부는 고령신씨(高靈申氏) 현감을 지낸 신치례(申致禮)이다.

김붕만은 임진왜란 당시 전라좌수영 소속인 흥양현(興陽縣) 사도진(蛇渡鎭)의 군관(軍官)으로 활약하면서 여러 전투에서 공을 세웠다. 또한 1592년(선조 25) 9월 부산포해전에서 적선 400여 척을 맞아 사도 1호선의 군관으로 종일 접전을 벌이다가 적의 총알에 맞아 중상을 입기도 하였다.

김붕만은 『난중일기』 1598년 1월 2일까지 등장하고 있으나, 『호남절의록』에는 한산도해전에서 전사하였다고 기록되어 있다. 『호남절의록』 내용상 한산해전은 1592년 7월 한산해전과 1597년 7월 칠천량해전을 칭하는 것으로 보인다. 그러나 김붕만의 기록이 1597년 7월 칠천량해전이 끝난 후인 1598년 1월 2일까지 이순신의 『난중일기』에 있는 것으로 보아 그의 사망 시기는 임진왜란 후로 보인다.

김붕만의 신위단비가 위치한 곳의 맞은편에는 1933년에 후손들이 삼연재(三然齋)와 충렬사(忠烈祠)를 지어 제향하고 있다. 이곳에는 김붕만에게 내린 「선무원종공신녹권」을 비롯한 고문서들이 소장되어 있다.

초고 수정

이 비석은 1914년 임진왜란 때 공을 세워 2등 공신으로 책봉되었던 무관 김붕만(金鵬萬)의 후손들이 세운 것이다.

김붕만은 임진왜란 당시 권율(權慄, 1537-1599)의 휘하에서 육지전에서 최초로 승리한 전투인 이치전투(1592)에 참전하였으며, 1594년 무과에 급제한 후 이순신(李舜臣, 1545-1598)의 진영에 합류해 여러 전투에 참여하여 공을 세웠다.

비문은 김붕만의 행적과 후대에 그를 추숭(追崇)하는 내용으로 되어 있다. 1913년에 송병화(宋炳華)가 비문을 짓고 송병길(宋炳吉)이 글씨를 썼으며, 이듬해에 김붕만의 11대·12대 후손 5인이 비석을 세웠다.

신위단비는 향토와 지역 문중 차원의 선현 추숭 활동을 알 수 있는 기록유산으로서 그 가치가 있으며, 비석 맞은편에는 후손들이 1928년에 세운 김붕만의 사당 삼연재(三然齋)가 있다.

1차 수정

신위단비는 조선시대의 무관 김붕만(金鵬萬)을 기리기 위해 1914년 후손들이 세운 것이다.

김붕만은 임진왜란 당시 권율(權慄, 1537~1599)의 휘하에서 이치전투(1592)에 참전하였으며, 이후 이순신(李舜臣, 1545~1598)의 진영에 합류해 여러 전투에서 공을 세웠다. 이후 그의 충절과 공로를 인정 받아 선무원종공신 2등에 책봉되었다.

비문은 김붕만의 행적과 후대에 그를 추모하는 내용을 담고 있다. 1913년에 송병화(宋炳華, 1582~1916)가 비문을 짓고 송병길(宋炳吉)이 글씨를 썼으며, 이듬해에 김붕만의 후손 5인이 비석을 세웠다.

비석 맞은편에는 1928년에 세운 김붕만의 사당 삼연재(三然齋)가 있다.

자문의견

  1. 분야별 자문위원 1
    • 의견 없음.
  2. 분야별 자문위원 2
    • 문화재 가치에 대한 평가 필요 - 제일 마지막에 추가 : ~ 비석 맞은편에는 1928년에 세운 김붕만의 사당 삼연재(三然齋)가 있다. 신위단비는 고흥 지역과 문중의 차원에서 건립하였다는 점에서 의의가 있다.
  3. 읽기 쉬운 문안 자문위원
    • 마지막에 문장 추가 : 삼연재에는 김붕만이 나라에서 받은 선무원종공신녹권이 보관돼 있다.
    • 신위단비는 조선시대의 무관 김붕만(金鵬萬)을 기리기 위해 1914년 후손들이 세운 것이다.=> 1914년이라는 연도보다 그의 사후에 후손들이 세운 비석이라는 점을 강조하는 게 더 적합해 보입니다.
    • 김붕만이 어떤 사람이었는지 좀더 정보가 들어가도 좋을 듯 합니다. 정보가 부족해서 좀 아쉽습니다.

2차 수정

신위단비는 조선시대의 무관 김붕만(金鵬萬)을 기리기 위해 후손들이 1914년에 세운 비석이다.

김붕만은 임진왜란 당시 권율(權慄, 1537~1599)의 휘하에서 이치전투(1592)에 참전하였으며, 이후 이순신(李舜臣, 1545~1598)의 진영에 합류해 여러 전투에서 공을 세웠다. 이후 그의 충절과 공로를 인정 받아 선무원종공신 2등에 책봉되었다.

비문은 김붕만의 행적과 후대에 그를 추모하는 내용을 담고 있다. 1913년에 송병화(宋炳華, 1582~1916)가 비문을 짓고 송병길(宋炳吉)이 글씨를 썼으며, 이듬해에 김붕만의 후손 5인이 비석을 세웠다.

비석 맞은편에는 1928년에 세운 김붕만의 사당 삼연재(三然齋)가 있고, 삼연재에는 김붕만이 공신에 책봉되었을 때 발급된 선무원종공신녹권이 보관되어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