토론:갈암금양강도지
2020 한중연 안내문안 작성
기존 국문
이 터는 갈암 이현일(李玄逸, 1627~1704)이 만년에 후학을 위하여 학문을 가르치던 곳으로 선생이 돌아가신 뒤 제자들이 뜻을 선생의 뜻을 이어가기 위하여 지은 것으로 전한다. 갈암은 퇴계(退溪) 이황(李滉)의 학통을 계승한 영남학파의 대표적 성리학자이다. 그는 68세 되던 해인 조선 숙종(肅宗) 20년(1694)에 갑술환국(甲戌換局)을 당하여 유배되었다가 73세 때인 1701년 유배에서 풀려났다. 이 때 후학들의 간청에 의해 이 곳에 우거 하였다고 한다. 갈암은 이 곳에 금양정사(錦陽精舍)를 세우고 후학들을 가르치면서 말년을 보냈다.
이 건물은 정면 5칸, 측면 5칸의 ‘口’자형 목조와가(木造瓦家)이다. 안채에는 덤벙주초 위에 네모난 기둥을 사용했고, 양쪽에 각 2칸의 온돌방을 배치하였다.
정확한 처음 건립연대는 알 수 없으나, 현재 건물은 고종(高宗) 38년(1901)에 지어진 것으로 추정된다.
수정 국문
초고
이곳은 조선 후기의 학자 갈암 이현일(葛庵 李玄逸, 1627~1704)이 만년에 금양정사를 짓고 후학을 양성했던 곳이다. 이현일은 이황(李滉, 1501~1570)의 학문을 정통으로 계승한 인물로 당시 영남학파를 대표했던 학자였다. 시문과 역(易), 이기설과 예설 등에 모두 밝았으며, 국정 개혁에 대한 의지도 매우 강했다. 문집인 『갈암집』에는 130여 편의 상소가 남아 있다.
이현일의 본관은 재령이며, 영해부(지금의 영덕군) 인량리에서 태어났다. 1646년과 1648년 연거푸 석연치 않게 소과에서 좌절하자 과거에 뜻을 접고 학문에 전념하였다. 1677년(숙종 3) 51세에 관직생활을 시작하여 출사와 귀향을 반복하며 여러 관직을 거쳐 1693년(숙종 19) 이조판서에 이르렀다. 그러나 1694년(숙종 20) 남인이 실권하고 서인이 집권하는 갑술환국 때 함경도 홍원과 종성으로 유배되었다가 전라도 광양과 갈은리로 이배되었다.
1699(숙종 25)년 유배에서 풀려나 1700년부터 1704까지 이곳에서 후진 양성에 힘을 기울였다. 금양정사의 문인록인 『금양급문록』에는 금양정사에서 이현일의 가르침을 받거나 교유한 인물 657명이 수록되어 있다. 이현일의 학문적 위치와 영향력을 알 수 있다.
현재의 건물은 1901년(고종 38)에 지은 것으로 건물 중앙에 안마당이 있는 ‘口’자형의 기와집이다. 정면 5칸, 측면 5칸이며, 마당을 제외한 건물의 칸 수는 모두 16칸이다.
1차 수정
이곳은 조선 후기의 학자 갈암 이현일(葛庵 李玄逸, 1627~1704)이 만년에 금양정사를 짓고 후학을 양성했던 곳이다.
이현일은 영해부(지금의 영덕군) 인량리에서 태어났다. 1646년과 1648년 연거푸 석연치 않게 소과에서 좌절하자 과거에 뜻을 접고 학문에 전념하였다. 이후 학문으로 명성이 높아져 1677년에 관직 생활을 시작하였고 1693년 이조판서가 되었다. 그러나 이듬해 갑술환국으로 유배되었으며, 1699년에 풀려난 이후로는 1700년부터 이곳에 머물며 후진 양성에 힘을 기울였다.
이현일은 이황(李滉, 1501~1570)의 학문을 정통으로 계승한 인물로 당시 영남학파를 대표했던 학자였다. 금양정사에서 이현일의 가르침을 받거나 교유한 인물을 기록한 『금양급문록』에는 657명에 이르는 인물이 기록되어 있어 이현일의 학문적 위치와 영향력을 알 수 있다.
현재의 건물은 1901년에 지은 것으로 추정된다. 인근에는 이현일을 기리는 유허비가 세워져 있는데, 초대부통령인 이시영(1869~1953)이 글씨를 썼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