청주 박광우 묘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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청주 박광우 묘소
Tomb of Bak Gwang-u
청주 박광우 묘소, 국가문화유산포털, 문화재청.
대표명칭 청주 박광우 묘소
영문명칭 Tomb of Bak Gwang-u
한자 淸原 朴光佑 墓所
주소 충청북도 청주시 서원구 남이면 수대리 산73-1
지정번호 충청북도 기념물 제71호
지정일 1987년 3월 31일
분류 유적건조물/무덤/무덤/기타
수량/면적 일곽
웹사이트 청주 박광우 묘소, 국가문화유산포털, 문화재청.



해설문

국문

2015

이 무덤에는 박광우(1495~1545) 선생이 안장되어 있다. 본래는 경기도 파주군 조리면 오산리에 있었던 것을 1977년에 지금의 자리로 옮겨 복원하였다. 위패비와 묘표 및 사적비·장명등·문인석·동자석 등이 갖추어져 있다. 묘소 입구에는 이장할 때 출토된 관곽과 청동 방울 5개 및 백자소호(白磁小壺)가 충청북도 민속문화재 제6호로 지정되어 보관되고 있다. 박광우는 조선 중기의 문신으로 자는 국이(國耳), 호는 필재(蓽齋)·잠소당(潛昭堂)이며, 본관은 상주이다. 1525년(중종20)에 문과에 장원 급제하여 여러 관직을 거쳐, 1545년(인종1)에 사간 지제교가 되었으나, 을사사화로 투옥되었다가 선동역에 유배되어 죽었다. 사상과 절의가 올곧아 뒤에 신원되었고, 이조판서에 추증되었다. 시호는 정절(貞節)이다.

2021

이곳은 조선 전기 문신 박광우(朴光佑, 1495~1545)의 묘소이다. 본관은 상주(尙州), 자는 국이(國耳), 호는 필재(蓽齋), 잠소당(潛昭堂)이다. 중종 20년(1525)에 과거에 급제하여 강릉부사(江陵府使) 등의 관직을 지냈으며, 조선 전기 대표적인 지리서인 『신증동국여지승람(新增東國輿地勝覽)』 편찬에 참여하였다. 이후 명종 즉위년(1545) 을사사화(乙巳士禍)*에 연루되어 유배를 가던 중 51세의 나이로 사망하였다. 훗날 선조 3년(1570)에 신분이 회복되어, 사후에 이조판서의 직이 내려졌다.

박광우 묘소는 본래 경기도 파주 조리읍 오산리에 있었으나, 1977년에 지금의 자리로 옮겼다. 옮길 때 나온 유물들은 충청북도 민속문화재로 지정되었다. 묘소에는 묘표, 사적비, 장명등, 문인석, 동자석 등이 갖추어져 있다.


  • 을사사화乙巳士禍: 조선 1545년 인종이 죽고 명종이 즉위하자 명종의 외숙인 윤원형이 인종의 외숙인 윤임 일파를 몰아내며 일어난 사화

영문

2015

This is the tomb of Bak Gwang-u (1495-1545), a scholar and government official of the Joseon Dynasty (1392-1910). Bak passed state examination in 1525, and held many government positions. During a series of literati purges in the late 15th and 16th centuries, a number of Confucian literati were persecuted by their political rivals. He was also imprisoned in 1545, and died while in exile. His honor was restored in 1570, and was posthumously promoted to a minister of rites. His body was first buried in Paju, Gyeonggi-do, but was moved to its present location in 1977. The coffin unearthed from the original tomb, along with bronze bells and a white porcelain jar, are designated as Chungcheongbuk-do Folklore Cultural Heritage No. 6.

2021

This is the tomb of Bak Gwang-u (1495-1545), a civil official of the Joseon period (1392-1910). Originally located in Paju, Gyeonggi-do Province, the tomb was moved here in 1977.

Bak Gwang-u passed the state examination in 1525 and served various official posts. Convicted of involvement in the literati purge of 1545, Bak was tortured and sent into exile but died before he could arrive at his exile destination. In 1570, his honor was reinstated, and Bak was posthumously promoted to minister of personnel.

In front of the burial mound are stone structures such as a spirit tablet, a table, an incense table, a tombstone, a lantern, a pair of child attendant statues, a pair of civil official statues, and a pair of pillars. The inscription on the tomb marker was composed in 1687 by the renowned scholar Song Si-yeol (1607-1689).

A number of burial goods were discovered during the relocation of the tomb, including a coffin made of juniper wood, five bronze bells, and a white porcelain jar. These were designated as a Chungcheongbuk-do Folklore Cultural Heritage.

영문 해설 내용

2021

조선시대의 문신 박광우(1495-1545)의 묘이다. 본래 경기도 파주에 있었으나 1977년 지금의 자리로 이장하였다.

박광우는 1525년에 과거에 급제하였으며, 여러 관직을 역임하였다. 1545년 사화에 연루되어 고문을 당한 후 유배형에 처해졌으나, 유배지에 이르기 전에 사망하였다. 1570년에 신원되었고 이조판서에 추증되었다.

봉분 바로 앞에 위패비가 있고, 그 외에 상석, 향로석, 묘표, 사적비, 장명등, 동자석 1쌍, 문인석 1쌍, 망주석 1쌍이 있다. 봉분 왼쪽에 있는 묘표의 글은 저명한 학자 송시열(1607-1689)이 1687년에 지었다.

이장하는 과정에서 향나무로 만든 관, 청동방울 5점, 백자 항아리 1점이 출토되었으며, 모두 충청북도 민속문화재로 지정되었다.

참고자료

  • 박광우, 디지털청주문화대전 http://cheongju.grandculture.net/cheongju/toc/GC00200894
  • 송인수묘소및신도비, 가좌리석조약사여래좌상, 박광우묘소 – 충북 청주[5], 문화재의 향기, 다음 블로그 https://blog.daum.net/mallarme8906/880 -> 석물 사진 상세함.
  • 을사전문록(乙巳傳聞錄) 박광우 전(朴光祐傳), 『대동야승』, 한국고전종합DB, http://db.itkc.or.kr/inLink?DCI=ITKC_BT_1321A_0010_000_0220_2002_003_XML -> 대궐 뜰에서 추국(推鞫)하고 봉산(鳳山) 동선역(洞仙驛)으로 정배하게 되었는데 유배지로 떠나지 못하고 장독(杖毒)으로 인하여 돈의문(敦義門) 밖에 나가다가 죽었다.
  • 박광우묘출토유물, 한국민족문화대백과사전 http://encykorea.aks.ac.kr/Contents/Item/E0020554 -> 충청북도 민속자료 제6호. 박광우의 묘는 원래 경기도 파주시 조리면 오산리에 있었다. 묘의 위치가 해방 이후 육군 작전지역 내에 있었기 때문에 후손들의 출입이 불가능하였을 뿐만 아니라 묘 관리와 성묘를 제때에 할 수가 없었다. 이에 부득이 1967년 2월 28일에 현재 위치인 충청북도 청원군 남이면 수대리로 이장하였는데, 이 과정에서 관곽(棺槨)과 청동령(靑銅鈴), 백자소호(白磁小壺)가 발견되었다. 이 유물들은 1982년 12월 17일 충청북도 민속자료 제6호로 지정되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