창녕 죽림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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창녕 죽림재
Jungnimjae Ritual House, Changnyeong
창녕 죽림재, 국가문화유산포털, 문화재청.
대표명칭 창녕 죽림재
영문명칭 Jungnimjae Ritual House, Changnyeong
한자 昌寧 竹林齋
주소 경상남도 창녕군 대미길 23-62(성산면)
지정번호 경상남도 문화재자료 제534호
지정일 2011년 6월 2일
분류 유적건조물/교육문화/교육기관/서당
시대 일제강점기
수량/면적 1동/94.3㎡
웹사이트 창녕 죽림재, 국가문화유산포털, 문화재청.



해설문

국문

창녕 죽림재는 조선 숙종 대에 사헌부 감찰을 지낸 파평윤씨 탕좌공의 5세손 윤우갑(尹佑甲)이 모친상을 당한 후 벼슬을 버리고 살았던 재실*로, 숙종 31년(1705)에 처음 지어졌으나 1914년에 다시 지어졌다.

죽림재의 ‘죽림’은 중국 남조시대에 부패한 정치권력에 등을 돌리고 대나무 숲에 모여 세월을 보낸 일곱명의 선비를 일컫는 ‘죽림칠현(竹林七賢)’에서 따온 이름이다. 윤우갑이 벗들과 함께 거문고와 술을 즐기고 시를 읊으며 한가롭게 지내고자 한 심정을 나타낸다.

창녕 죽림재는 화려한 기교와 장식은 없지만 예스럽고 소박한 멋이 있다. 연대가 비교적 오래되고, 전통 건축 양식에 일부 근대적인 구조 특성이 더해져 학술적, 역사적 보존가치가 있다.


  • 재실 : 제사를 지내기 위하여 시조나 중시조의 묘소 또는 사당 근처에 세운 건물

영문

Jungnimjae Ritual House, Changnyeong

This ritual house was established in 1705 by Yun U-gap (1659-1720) following the death of his mother. The current building was built in 1914.

Originally from Changnyeong, Yun U-gap passed the state examination in 1699 and served various official posts. After his mother died, he returned to his hometown where he led a secluded life. The name of this ritual house means “bamboo forest” and comes from a story about seven Chinese scholars, writers, and musicians from the 3rd century who turned their back on the corrupt political authority and lived in a bamboo forest.

This building has a wooden-floored hall at the center and underfloor-heated rooms on either side. There is a narrow wooden veranda in front of the hall and the room on the right, while there is an elevated wooden-floored porch with a balustrade in front of the room on the left.

영문 해설 내용

죽림재는 윤우갑(1659~1720)이 모친상을 당한 후 지은 재실이다. 1705년에 처음 지어졌고, 현재의 건물은 1914년에 다시 지어졌다.

창녕 출신인 윤우갑은 1699년에 과거에 급제하여 관직을 지내다가, 모친상을 당한 후 고향으로 돌아와 평생 은거하며 지냈다. 재사의 이름은 '대나무숲'이라는 뜻으로, 중국 남조시대에 일곱 선비가 부패한 정치권력에 등을 돌리고 대나무 숲에 모여 살았다는 이야기에서 따왔다.

가운데 대청을 두고 양쪽에 온돌방을 배치했다. 대청과 오른쪽 방 앞에는 툇마루를 두었고, 왼쪽 방 앞에는 난간을 두른 누마루를 두었다.

참고 자료

=>지금의 규모로 옛터의 남쪽에 건립한 것은 대개 5~60년 전 일이고, 또 이곳을 좋지 않다고 여겨 옛터로 옮긴 것은 실로 태상(太上) 병인년(1866, 고종3)이었다.
=>재사의 규모는 동서로 4칸 남북으로 4칸인데, 좌우로는 온돌방을 만들고 마루는 그 가운데 있으며 부엌 창고 행랑이 다 갖추어졌다.
=>나의 고종형〔表兄〕 윤성채(成采) 씨는 전중공의 후손이다. 이에 재사가 이 지경에 이른 것을 개탄하고 문중 어른들에게 아뢰어, 비축해 놓은 다소간의 문중 재물로 퇴락한 재사를 진작하고 회복하여 여기에 거처하여 학업을 익히도록 할 것을 청하였다. 여러 어른들이 모두 “좋다!”고 하니, 이에 창문을 수리하고 벽을 새롭게 하고 담장을 견고하게 하여, 글방의 스승을 모셔다가 생활할 양식을 드리고 스승을 따라 배우는 사람들에게 학비를 대주었다. 이윽고 또 부엌과 곁채 3칸을 옮겨 지어 규모가 들어맞게 하고, 나에게 기문을 청하였다.
  • 윤우갑 : 창녕 대산리에서 태어나 1699년 과거에 급제. 어머니 상을 마치고 “녹봉으로 이제 어머니를 봉양할 수 없으니, 차라리 내가 좋아하는 것을 따르지 않겠는가〔祿無以及養, 無寧從所好?〕”라고 하며 벼슬을 그만두었으나 실제로는 상국 권대운(權大運, 1612~1699) 이하 영남의 여러 어진 이들이 쫓겨나자 다시 벼슬하여 나아갈 뜻을 두지 않았다고 하였다. (《소눌집(小訥集)》 권35 〈통훈대부 사헌부 감찰 연곡 윤공 묘지명(通訓大夫司憲府監察淵谷尹公墓誌銘)〉)
  • 전통 건축 양식에 일부 근대적인 구조 특성이 더해져-> 구체적으로 확인 어려움.
  • 죽림재 앞에는 하늘은 둥글고 땅은 네모나다라는 천원지방(天圓地方)의 전통적인 우주관을 보여주는 방지方池와 섬이 있어 죽림재가 재실뿐만 아니라 정자亭子로도 이용되었음을 알 수 있다. -> 1914년 다시 지으면서 복원한 것으로 보임.(재사에는 옛날에 죽림(竹林)과 연지(蓮池)가 있었는데, 폐하고 묻힌 것이 또한 오래되었다. 근래에 자못 죽림을 북돋우고 연지를 수축하여 그 옛 경관을 회복하였다고 한다. - 암서집 권 20 - 죽림재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