창녕 성사제 망제단 비석
| 창녕 성사제 망제단 비석 Stele at the Memorial Altar of Seong Sa-je, Changnyeong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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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대표명칭 | 창녕 성사제 망제단 비석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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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영문명칭 | Stele at the Memorial Altar of Seong Sa-je, Changnyeong |
| 한자 | 昌寧 成思齊 望祭壇 碑石 |
| 지정(등록) 종목 | 경상남도 문화유산자료 |
| 지정(등록)일 | 2021년 10월 21 |
| 분류 | 기록유산 / 서각류 / 금석각류 / 비 |
| 시대 | 조선(1871년) |
| 수량/면적 | 1기 |
| 웹사이트 | 창녕 성사제 망제단 비석, 국가유산포털, 국가유산청. |
해설문
국문
망제단이란 먼 곳에서 조상의 무덤이 있는 쪽을 바라보고 제사를 지내는 단으로, 창녕 성사제 망제단 비석은 고려 말의 충신인 성사제의 충절을 기리기 위해 묘소를 대신하여 세운 것이다.
순조 10년(1810) 창녕 성사제 신도비(경상남도 문화유산자료)가 세워진 이후 고종 8년(1871) 정절공으로 추증*된 이듬해 망제단 비석이 세워졌다.
성사제는 공양왕 때 보문각 직제학의 관직을 지내다가 이성계가 조선을 건국하자 이를 한탄하며 자리에서 물러나 끝까지 관직에 나아가지 않았다. 특히 두문동 72현의 한 사람으로 널리 알려져 있다. 원래 두문동은 경기도 광덕산 서쪽의 골짜기를 이르는 지역이나 고려 말 72명의 신하들이 조선 건국에 반대하여 관직을 거부하고 숨어지내던 곳으로 더 유명하다.
비석은 조선 후기 신도비의 형태를 따라 비신과 옥개석을 갖추었다. 비석의 형태는 일반적이나 비문에 두문동 72현으로 알려진 성사제의 업적이 기록되어 있다는 점에서 문화유산적 가치가 크다.
- 추증(追贈): 나라에 공로가 있는 관료가 죽은 뒤에 품계를 높여 주던 일
영문
Stele at the Memorial Altar of Seong Sa-je, Changnyeong
This stele was erected in 1872 to commemorate the loyal devotion of Seong Sa-je, a civil official of the Goryeo dynasty (918-1392).
When Goryeo fell and the Joseon dynasty (1392-1910) was founded, Seong Sa-je withdrew from office in grief. He steadfastly refused all offers of appointment under the new dynasty and, together with other loyal subjects of Goryeo, retreated into the Dumundong Valley on the western slopes of Gwangdeoksan Mountain near Gaegyeong, the former Goryeo capital, where he lived in seclusion. He sent his wife and son back to his hometown of Changnyeong and left instructions that no tomb be built for him after his death.
His descendants settled in the Changnyeong area, and in 1810 a memorial stele (Gyeongsangnam-do Cultural Heritage Material) was erected beside his wife’s tomb. In 1871, King Gojong (r. 1863-1907) honored Seong Sa-je’s loyalty by posthumously conferring on him the title Lord of Steadfast Integrity, and the following year this stele was erected in lieu of a tomb.
The stele follows the general form of late Joseon memorial steles, comprising a base stone, a body stone, and a capstone. The body stone bears an inscription recording the deeds and virtues of Seong Sa-je.
영문 해설 내용
이 비석은 고려 말의 문신 성사제의 충절을 기리기 위해 1872년에 세워졌다.
성사제는 고려가 망하고 조선이 건국되자, 이를 한탄하며 관직에서 물러났다. 새 왕조에서의 벼슬을 끝까지 사양하고, 고려의 다른 충신들과 함께 고려의 도읍이 있던 개경의 광덕산 서쪽 두문동 골짜기에 들어가 은둔하였다. 그는 부인과 아들을 고향인 창녕으로 돌아가게 했고, 자신이 죽은 후에 묘를 조성하지 말라 하였다.
이후 그의 후손들이 창녕 지역에 세거하게 되었고, 1810년 부인의 묘 옆에 신도비(경상남도 문화유산자료)가 세워졌다. 1871년에는 고종(재위 1863-1907)이 그의 충절을 기려 정절공(貞節公)이라는 시호를 내렸고, 그 이듬해 묘소를 대신하여 이 비석을 세웠다.
이 비석은 조선 후기 일반적인 신도비와 유사한 형태로 받침돌, 몸돌, 지붕돌로 이루어져 있다. 몸돌에는 성사제의 업적을 기록한 비문이 새겨져 있다.
참고자료
- 고종실록8권, 고종 8년 3월 16일 병오 4/4 기사, “시호를 추증하다” https://sillok.history.go.kr/id/kza_10803016_00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