진주 도통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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진주 도통사
Dotongsa Shrine, Jinju
진주 도통사, 국가문화유산포털, 문화재청.
대표명칭 진주 도통사
영문명칭 Dotongsa Shrine, Jinju
한자 晉州 道統祠
주소 경상남도 진주시 내동면 유수리 724
지정번호 경상남도 문화재자료 제63호
지정일 1983년 7월 20일
분류 유적건조물/인물사건/인물기념/사우
수량/면적 2동
웹사이트 진주 도통사, 국가문화유산포털, 문화재청.



해설문

국문

도통사는 공자(孔子), 주자(朱子), 안자(安子)를 모신 사당이다.

도통사는 전국 여러 곳에 세워졌는데, 1917년 중국 궐리사(闕里祠)로부터 우리나라 성리학의 조종(祖宗)인 안향(安珦)을 우리나라 유일의 안자(安子)라는 성현의 칭호를 받아 설립된 공교지회(孔敎支會)로 혜산 이상규(李祥奎)가 주도하였다.

건물은 사당인 도통사, 동문당, 연산재, 광명각이 있다. 처음에는 대평면 하촌리에 있었으나 1995년 남강댐 숭상공사로 물에 잠기게 되어 이곳으로 옮겼다. 광명각에는 도통사지를 인쇄하기 위해 만든 도통사지 목판이 보관되어 있다.

영문

Dotongsa Shrine, Jinju

This shrine was established in 1913 to enshrine the portraits of Confucius (551-479 BCE), who founded Confucianism, Zhu Xi (1130-1200), who founded neo-Confucianism, and An Hyang (1243-1306), who introduced neo-Confucianism to Korea. The name Dotongsa means “Shrine of the Lineage of the Way,” referring to this core tradition by which neo-Confucianism was brought to Korea.

An Hyang was a scholar of the Goryeo period (918-1392). In 1289, he escorted the Goryeo king and queen to Yuan China. During his visit, he transcribed the collected writings of Zhu Xi and acquired portraits of Confucius and Zhu Xi, which he brought to Korea. Through his writings, neo-Confucianism began to gain popularity in Korea.

This shrine was originally located in Hachon-ri, Daepyeong-myeon, but it was moved to its current location due to the construction of the Namgang Dam in 1995. The complex includes a main gate, a lecture hall, an archive, a woodblock repository, an inner gate, and a shrine.

영문 해설 내용

유교의 시조인 공자(기원전 551-479), 성리학을 세운 주자(1130-1200), 한국에 성리학을 처음 들여온 안향(1243-1306)의 영정을 모시기 위해 1913년에 지은 사당이다. ‘도통’이란 도학의 전수에 중심이 되는 계통이라는 뜻이다.

안향은 고려시대의 학자로 1289년 왕과 왕비를 모시고 원나라에 갔다가, 주자의 저술을 필사하여, 공자와 주자의 초상과 함께 가지고 돌아왔다. 그의 저술을 통해 한국에서 성리학이 자리잡기 시작하였다.

원래 대평면 하촌리에 있었던 이 사당은 1995년 남강댐 공사로 인해 지금의 자리로 옮겨졌다. 경내에는 정문, 강당, 서고, 장판각, 내삼문, 사당 등의 건물이 자리하고 있다.

참고자료

공자의 후손은 안자(安子) 칭호 외에 유학의 종교화 운동인 공교지회의 설립을 제안받고 허락한다. 1917년 8월 혜산 이상규를 초대회장으로 추대하고, 조선의 도통사에 공교지회가 설립됐다. 그 뒤 불의의 화재와 안자의 영정이 도난되는 등 수많은 시련을 겪었지만, 순흥 안씨 문중과 진주지역 유림의 관심 덕분에 공자와 주자의 영정은 오늘날까지 보존됐다.

  • 채용신의 붓끝에서 되살아난 위대한 영혼들, 조정육의 행복한 그림 읽기, 다음 블로그 http://blog.daum.net/sixgardn/15771242 -> 공자, 주자 초상 관련1647714&rc_ritem_no=
  • (참고)慶南地域 空樓의 建築的 特性에 關한 硏究, 정경석, 경남대학교 석사학위 논문, 2005 ->‘공루’ 관련 논문


  • 공자와 주자의 영정은 1914년 채용신이 ‘제작’하였고, 안자의 영정은 ‘경기도’에서 1913년에 옮겨온 것이다. 채용신은 공자와 주자의 영정을 제작하면서 안자의 영정에도 가채하였다.
  • 건물별 기능 : 이종수 논문 참조. / 정문인 계동문 상부에는 다락과 같이 빈 공간을 두고 마루를 시설하였으며(‘공루’라고 함 – 관련 논문 참조 자료 제시), 광명각에는 󰡔도통사지󰡕 인쇄를 위해 만든 목판이 보관되어 있다. / 동문당 서쪽에 六經四子書를 소장하고 있었는 萬卷居(=연산재로 보임)가 있다.
  • 동문당은 1934년 중건되었다. 도통사 현판은 공자의 76대손 공영이가 썼다고 한다. 2005년에 보수공사를 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