종법실(원불교 익산성지)

HeritageWiki
이동: 둘러보기, 검색
종법실 宗法室
Jongbeopsil Hall
성보 제08호 익산성지 종법실, 원불교 소개 홈페이지.
Goto.png 종합안내판: 원불교 익산성지



해설문

국문

종법실은 1927년에 지어진 건물로 원래 이름은 영춘헌(迎春軒)이었다. 처음에는 사무실과 남자 숙소로 사용되다가 1936년 사무실이 구정원으로 옮겨가면서 소태산 대종사의 거처로 사용되었다. 소태산 대종사가 1937년부터 1943년 열반하기 직전까지 7년간 이곳에 머물렀다. 당시에는 교조가 기거하는 건물이라고 해서 조실(祖室)로 불렀다. 1971년 종법원으로 조실이 옮겨 가면서 종법실이라는 이름을 붙였다. 현재 소태산 대종사와 정산 종사의 영정이 봉안되어 있다.

이 건물은 일본식 주택의 영향을 받은 개량 한옥이다. 4개 방은 방과 방 사이에 미닫이를 달아 필요에 따라 문을 떼어 대중 집회를 열 수 있도록 했다. 유리 미닫이와 창호, 처마 끝의 함석 차양 등을 설치한 외관을 통해 근대기 한옥의 변화를 살펴볼 수 있다.

영문

Jongbeopsil Hall (Iksan Sanctuary of Won-Buddhism)

Jongbeopsil Hall was built in 1927 to accommodate the growing number of disciples of Won-Buddhism. It was first used as an office and a sleeping area for the male believers of the order. From 1937, it served as the living quarters of Bak Jung-bin (1891-1943), the founder of Won-Buddhism. After Bak Jung-bin died, his successor Song Kyu (1900-1962) stayed here. Currently, the building is used as a shrine for the portraits of Bak Jung-bin and Song Kyu.

This building features modern architectural characteristics, such as glass sliding doors, glass windows, and tin awnings, which were common during the Japanese colonial period (1910-1945). Inside, there are four rooms with sliding doors installed between them, which can be opened to create a spacious interior for public gatherings.

영문 해설 내용

종법실은 원불교의 교세가 확장되면서 늘어난 수행자들을 수용하기 위해 1927년에 지은 건물이다. 처음에는 교단 사무실 겸 남자 신도들의 숙소로 사용되다가, 1937년부터는 원불교 창시자 박중빈(1891-1943)의 처소로 이용되었다. 박중빈이 세상을 떠난 후에는 그의 후계자인 송규(1900-1962)가 이곳에 머물렀다. 현재 이곳에는 박중빈과 송규의 영정이 모셔져 있다.

이 건물은 유리 미닫이문, 창호, 처마 끝의 함석 차양 등 일제강점기 근대 주택의 영향을 받은 특징을 보인다. 안에는 4개의 방이 있는데, 각 방 사이에 미닫이문을 달아 필요한 경우 문을 떼고 전체를 개방된 공간으로 활용하여 대중 집회를 열 수 있도록 하였다.

참고자료

  • 원불교 익산성지, 디지털익산문화대전 http://iksan.grandculture.net/iksan/toc/GC07500482 ->종법실은 구조실이라고도 불리며 1928년 지어졌다. 박중빈이 열반 전까지 머물렀던 공간이며, 후계자인 정산 송규도 종법실에 거처하였다. 이후 종법실이 신축되면서 현재는 소태산 대종사, 정산 종사의 영정이 봉안되어 있다.
  • 성보 제08호 익산성지 종법실, 원불교 소개 https://guide.won.or.kr/pages/sungji/iksan/7 -> 원불교를 창교한 소태산 대종사가 원기 22년(1937)년부터 원기 28년(1943)년까지 7년간 주석한 건물입니다. 원기 12년(1927) 교세의 확장에 따라 여제자들을 위한 부인선원(婦人禪院)으로 사용하기 위해 지은 건물입니다. 신축 당시에는 맞배지붕 3칸 겹집이었으나 그 이듬해인 원기 13년(1928)에 좌우에 한 칸씩을 더 달아내 현재의 모습을 갖추었습니다. ‘꽃피는 봄날에 지었다.’고 해서 처음에는 ‘영춘원(迎春院)’이라 불렀으나 소태산 대종사가 금강원에 주석하면서 격을 낮추어 ‘영춘헌(迎春軒)’이라 불렀습니다. 건축 추진 당시에는 부인선원으로 활용하기 위한 것이었으나 막상 준공이 되자 도치원을 부인선원으로 활용하기로 하면서 사무실과 남자 숙소로 사용되었습니다. 원기 21년(1936) 백백교 사건 이후 신흥종교에 대한 일본 경찰의 감시가 심해지자 사무실이 부인선원가 떨어진 구정원으로 옮겨가면서 소태산 대종사가 거처하는 조실로 사용되기 시작했습니다. 소태산 대종사는 열반에 들기 직전까지 이곳에 상주하면서 전법교화에 힘썼습니다. 원기 56년(1971)년 바로 옆에 종법원을 신축되면서 조실이 그곳으로 옮겨가자 구조실이란 명칭으로 불려지기 시작했습니다. 현재 내부에는 소태산 대종사의 초상화가 모셔져 있으며 초상화 우측에는 소태산 대종사의 친필 사은(四恩)과 좌측에는 소태산 대종사의 게송(偈頌)이 써 붙어있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