정읍 동학농민혁명 유적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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해설문

국문

동학농민혁명이란

조선 고종 31년(1894년)에 전봉준을 비롯한 동학도와 농민들이 봉건체제를 개혁하고 일제의 침략으로부터 국권을 수호하기 위하여 전개했던 농민 중심의 혁명을 말한다. 고부군수 조병갑의 횡포와 착취에 대한 항거에서 시작되었으며, 후에 항일 의병투쟁과 3․1운동으로 계승되었다.

동학농민혁명의 발생배경

19세기 세도정치가 이루어지면서 중앙정치의 기강 문란으로 삼정의 문란을 초래하였다. 지방관들의 농간과 매관매직의 성행으로 민중의 삶은 고통이 가중되어 갔다. 이로 인한 문중의 불만이 커지면서 봉건사회의 모순을 스스로 해결하려는 주인의식이 싹트게 되었다. 이러한 농민들의 불만은 봉건통치 계급의 무자비한 착취와 외세 침략에 대항한 민중의 저항의식으로 발전되어 1892년경 전국적으로 농민봉기가 발생하였다.

동학농민혁명의 역사적 의의

동학농민혁명은 모든 사람이 사람답게 사는 세상을 만들고자 반봉건, 반외세를 외치며 민중이 역사의 주인공으로 등장한 사건이다. 비록 미완의 혁명으로 끝났으나 그들의 애국애족 정신은 훗날 일제시기의 항일운동을 비롯한 4․19혁명, 5․18광주민주화 운동의 정신적 근간으로 민주주의 발전에 많은 영향을 미치며 오늘날 평등사상과 자유민주화의 지평을 연 근대 민족사의 대사건이다.

동학농민혁명 연대기

  • 1894년 1월 10일 고부농민들 말목장터에서 봉기하여 고부관아 점령
  • 1894년 3월 20일 무장현 당산에서 창의문 낭독(무장기포)
  • 1894년 3월 26일 백산 결진 / 총대장-전봉준, 총관령-김개남, 손화중
  • 1894년 4월 7일 정읍 황토현에서 전라감영군 격파
  • 1894년 4월 27일 호남의 전주성 입성(전주성 점령)
  • 1894년 5월 8일 전주 화약 체결 / 농민 해산 및 집강소 설치 합의
  • 1894년 7월 6일 전주 회담 / 전라도 전지역 집강소 설치
  • 1894년 9월 10일 삼례에서 재봉기 준비
  • 1894년 10월 21일 전봉준과 손병희 농민군 논산에서 공주로 진격
  • 1894년 11월 9일 우금치 전투 / 농민군 패퇴
  • 1894년 11월 15일 논산 황화대에서 접전을 벌였으나 강경으로 패주
  • 1894년 11월 27일 태인전투를 끝으로 농민군 완전히 해산

전봉준(全琫準) 1855~1895

동학농민혁명을 이끈 대표 인물로써 고부농민봉기를 주도하였으며 백산에서 농민군 총대장이 되었다. 농민군을 이끌고 전주성을 점령하고 전라도 전역에 집강소를 설치하기로 하고 관민협치를 실현했다. 이후 일본의 내정간섭이 심해지자 재봉기를 결정하고 삼례에 대도소를 설치한다. 공주 우금치에서 대결전을 벌이지만 끝내 성공하지 못하였다.

김개남(金開南) 1853~1894

동학농민혁명이 일어나자 백산에서 총관령이 되어 황토현전투와 황룡전투의 승리에 큰 기여를 하였으며 전주성 점령에도 큰 역할을 한다. 재봉기 과정에서 공주로 진격하는 전봉준장군과 합류하지 않고 청주성을 공격하였으나 성공하지 못하고 남하하여 후일을 도모하고자 했으나 체포되어 전주에서 생을 마감한다.

손화중(孫華仲) 1861~1895

동학교단의 대접주로써 전봉준장군과 함께 무장에서 기포한다. 백산에서 총관령이 되어 황토현전투와 황룡전투를 승리로 이끌었다. 재봉기 과정에서 일본군이 남해안으로 올 것을 대비하여 나주와 광주지역을 방어했다. 동학농민군이 패배하자 체포되어 서울로 압송된 후 전봉준장군과 함께 생을 마감한다.

최경선(崔景善) ~ 1895

정읍시 북면 월천동에서 출생하여 1893년 11월 고부군민들의 사발통문 대표로 참여하여 다음해 정월 고부농민봉기를 이끌었다. 전봉준의 모주(제일모사)라 표현할 정도로 각별한 관계였다. 재봉기 과정에서 일본군이 나주해안으로 침입한다는 설이 있어 서울 진격에 참가하지 않고 손화중과 나주를 방어했다. 동학농민군 패배 후 서울로 압송되어 전봉준, 손화중장군과 함께 생을 마감한다.

영문

What is the Donghak Peasant Revolution?

The Donghak Peasant Revolution was a nationwide resistance movement to fight for the defense of the country and the peace of the people. Beginning as a local rebellion in 1894 in Gobu (present-day Jeongeup area), the revolution was sparked by the excessive exploitation of peasants by local officials under Korea’s antiquated social class system. The movement is named after the indigenous religious movement known as Donghak (“Eastern Learning”), which inspired the movement.

Background of the Donghak Peasant Revolution

In the 19th century in Korea, the central government fell into disarray and tax corruption became rampant as officials and royal family members grappled for political power. Meanwhile, local magistrates excessively exploited the peasants, worsening the lives of the common people. In response, a sense of self-determination arose among the people, who took it upon themselves to resolve the hypocrisy of class discrimination. This movement evolved into the collective resistance against ruthless exploitation and foreign invasion known as the Donghak Peasant Revolution.

Historical Significance of the Donghak Peasant Revolution

The Donghak Peasant Revolution was a democratization movement opposing social class divides and foreign influence. Although it failed after a year when most of its leaders were arrested, its principles deeply influenced significant modern Korean events like the anti-Japanese activities, the March First Independence Movement, the April 19th Revolution, and the May 18th Democratic Uprising. This spirit also greatly advanced Korea’s ideals of democracy and equality.

Timeline of the Donghak Peasant Revolution

  • January 10, 1894: Peasants in Gobu (today’s Jeongeup) rose up and seized the local government office.
  • March 20, 1894: Proclamation of the uprising at Mujang (today’s Gochang).
  • March 26, 1894: An assembly was held at Baeksan to elect Jeon Bong-jun as the General Commander, with Kim Gae-nam and Son Hwa-jung as his lieutenants.
  • April 7, 1894: The peasant army defeated the army of Jeolla-do Province at Jeongeup.
  • April 27, 1894: The peasant army captured Jeonjuseong Fortress.
  • May 8, 1894: A peace agreement was signed in Jeonju to disband the peasant army and agree to establish local autonomous offices.
  • July 6, 1894: A meeting was held in Jeonju to discuss the establishment of local autonomous offices throughout Jeolla-do Province.
  • September 10, 1894: The peasant army prepared for another uprising in Samnye.
  • October 21, 1894: The peasant army, led by Jeon Bong-jun and Son Byeong-hui, advanced from Nonsan to Gongju.
  • November 9, 1894: The peasant army was defeated in the Battle of Ugeumchi.
  • November 15, 1894: The peasant army engaged in a battle at Nonsan but retreated to Ganggyeong.
  • November 27, 1894: The peasant army completely disbanded after the Battle of Taein.

Jeon Bong-jun (1855-1895)

A key leader of the Donghak Peasant Revolution, Jeon Bong-jun led the peasant uprising in Gobu in 1894 and was later appointed as general commander. Jeon captured Jeonjuseong Fortress and negotiated a peace agreement with the Korean government to establish local administrative offices across the province. Following the outbreak of the First Sino-Japanese War, he decided to initiate a second uprising to resist the Japanese invasion. When the peasant army was defeated at the Battle of Ugeumchi in Gongju, Jeon was captured and sent to Seoul, where he was executed.

Kim Gae-nam (1853-1894)

As a lieutenant, Kim Gae-nam contributed the victories at Hwangtohyeon and Hwangnyong and also played a key role in the capture of Jeonjuseong Fortress. During the second uprising, he led an attack on Cheongjuseong Fortress, which was unsuccessful. While retreating southward to plan further actions, he was captured and executed in Jeonju.

Son Hwa-jung (1861-1895)

Son Hwa-jung joined Jeon Bong-jun’s fight as a representative of the Donghak Church, contributing to the victories at Hwangtohyeon and Hwangnyong as a lieutenant. During the second uprising, he was stationed in the Naju and Gwangju areas to prepare for a Japanese attack from the southern coast. When the peasant army was defeated, he was captured and sent to Seoul, where he was executed alongside Jeon.

Choe Gyeong-seon (?-1895)

Born in Wolcheon-dong Village in Jeongeup, Choe was a leader of the peasant uprising in Gobu and was especially close to Jeon Bong-jun. During the second uprising, due to a rumor that the Japanese troops would attack the Naju coast, he stayed to defend Naju alongside Son Hwa-jung rather than going to Seoul. When the peasant army was defeated, he was captured and sent to Seoul, where he was executed alongside Jeon and Son.

영문 해설 내용

동학농민혁명이란

동학농민혁명은 나라를 지키고 백성을 편안하게 하기 위해 전개되었던 전국적인 대규모 항쟁이다. 1894년 고부(지금의 정읍 지역)의 군수가 농민들을 과도하게 수탈함에 따라 농민군이 봉기하며 시작되었다. 이 혁명의 이름은 동학이라는 민족 종교의 이름에서 비롯되었다.

동학농민혁명의 발생 배경

19세기 한국에서는 왕실의 일원과 신하가 권세를 잡으면서 중앙정치의 기강이 문란해지고 수취체제 역시 부정부패로 변질되었다. 지방에서는 관리들이 농민들을 과도하게 수탈하였고 이로 인해 백성들의 삶은 고통이 가중되어 갔다. 이러한 상황에서 백성들 사이에서는 봉건사회의 모순을 스스로 해결하려는 주인의식이 싹트게 되었으며, 무자비한 착취와 외세 침략에 대항한 농민봉기가 전국적으로 발생하여 동학농민혁명으로 발전되었다.

동학농민혁명의 역사적 의의

동학농민혁명은 반봉건, 반외세를 추구한 민중화 운동이었다. 1년여간 계속된 이 혁명은 지도부 대부분이 체포되면서 비록 실패하였으나, 혁명의 기본 정신은 이후의 항일 의병 운동, 3.1운동, 4.19혁명, 5.18민주화운동 등 한국 근대사에서 나타난 주요 사건의 정신적 근간이 되었다. 또한 이 정신은 한국 민주주의, 평등사상 등의 발전에 많은 영향을 미쳤다.

전봉준(全琫準) 1855~1895

전봉준은 동학농민혁명을 이끈 대표적인 인물로, 1894년 고부에서의 농민 봉기를 주도하였으며 이후 총대장으로 추대되었다. 전봉준은 전주성을 점령하였다가, 전라도 전역에 집강소를 설치하기로 조선 조정과 강화를 맺었다. 그러나 곧 청일전쟁이 발발하며 전봉준은 일본의 침략에 저항하기 위해 2차 봉기를 결정하였다. 농민군이 공주 우금치전투에서 패배하였을 때, 전봉준은 체포되어 서울로 압송된 뒤 처형되었다.

김개남(金開南) 1853~1894

총관령이었던 김개남은 황토현과 황룡에서의 승리와 전주성 점령에 크게 기여하였다. 2차 봉기 과정에서 청주성을 공격하였으나 성공하지 못하였고, 남하하여 후일을 도모하고자 했으나 체포되어 전주에서 처형되었다.

손화중(孫華仲) 1861~1895

손화중은 동학교단의 대접주로써 전봉준과 함께 기포하였으며, 총관령이 되어 황토현전투와 황룡전투를 승리로 이끌었다. 2차 봉기 과정에서 일본군이 남해안으로 올 것을 대비하여 나주와 광주 지역을 방어했다. 농민군이 패배하자 체포되어 서울로 압송된 후 전봉준과 함께 생을 마감하였다.

최경선(崔景善) ~ 1895

정읍 월천동에서 출생한 최경선은 고부 봉기의 대표 중 하나였으며 전봉준과도 각별한 관계였다. 2차 봉기 과정에서 일본군이 나주 해안으로 침입한다는 설이 있어 서울 진격에 참가하지 않고 손화중과 나주를 방어했다. 농민군 패배 후 서울로 압송되어 전봉준, 손화중과 함께 생을 마감하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