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장흥 죽암 고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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장흥 죽암 고택
장흥 죽암 고택, 국가문화유산포털, 문화재청.
대표명칭 장흥 죽암 고택
한자 長興 竹菴 古宅
주소 전라남도 장흥군 관산읍 방촌길 69-1 (방촌리)
지정번호 전라남도 민속문화재 제38호
지정일 2002년 11월 27일
분류 유적건조물/주거생활/주거건축/가옥
시대 조선시대
수량/면적 1동(棟)
웹사이트 장흥 죽암 고택, 국가문화유산포털, 문화재청.



해설문

기존 국문

장흥군 관산읍 방촌의 내동마을 안쪽 깊숙한 곳에 자리한 장흥위씨 종가댁이다. 방촌마을은 장흥위씨 집성촌으로 임진왜란 이후 17세기 초엽에 동족적 기반을 마련하기 시작하고 위덕화(1551~1598)의 장남 위정철이 방촌으로 옮겨오면서 자리를 마련한 곳이 현재의 위성렬 가옥魏聖烈家屋이다. 이 자리는 고려시대 장흥부의 동헌이 있던 터로 알려지고 있다.

위성렬 가옥은 서향으로 안채와 사랑채 등이 자리하고 있는데 현재 사당, 안채, 사랑채, 그리고 헛간채로 구성되어 있다. 이 중에서 사당은 1621~1627년에 지어진 것으로 추정되는데 그 규모와 양식, 그리고 연륜면에서 주목할 만한 가치가 있다. 1657년에 위정철이 재산을 분배한 고문서에 의하면, 장남인 위동전에게 전해진 가옥의 규모는 사당 3칸, 기와집 20칸, 대청 5칸에 이르렀음을 알 수 있다. 따라서 이 가옥은 17세기 초반에 마련된 것으로, 이후 건물의 배치가 바뀌었고 사당만이 원형대로 전하고 있다.

수정 국문

초고

이 집은 장흥위씨 판서공파 시조 위덕화(魏德和, 1551~1598)의 종택이다. 장흥위씨는 위덕화와 아들 위정철(魏廷喆, 1583~1657) 이후로 이곳 방촌마을에 대대로 거주했다. 죽암(竹庵)은 위덕화의 신도비를 세운 10대 종손 위계문(1865~1951)의 호이다.

위덕화는 1585년(선조 18) 무과에 급제하고 임진왜란 때 의주까지 선조를 호종했다. 이후 언양현감과 군자감정(軍資監正) 등을 지냈고 호조판서로 추증되었다. 위정철은 1603년 무과에 급제했으며 1631년(인조 9) 3~5월 사신으로 심양에 다녀온 후에 『심양왕환일기(瀋陽往還日記)』를 남겼다.

죽암고택은 사랑채와 안채, 사당, 행랑채 등으로 구성되었다. 후손들에 의하면 종택은 1623년(인조 1)에 처음 지었으며 1945년에 터를 옮겨 다시 지었다고 한다. 사당은 1624년 건축 당시의 원형대로 보존되어 있다. 사당에는 위덕화의 신주를 모시고 있으며,(※ 확인 예정) 장례 시 신주를 모시는 영여(靈輿)도 함께 보관되어 있다. 죽암고택과 이 일대는 고려 때 장흥부의 동헌이 있던 곳이라고 한다.

1차 수정

죽암고택은 장흥위씨 판서공파 시조 위덕화(魏德和, 1551~1598)의 종택이다. 장흥위씨는 위덕화와 아들 위정철(魏廷喆, 1583~1657) 이후로 이곳 방촌마을에 대대로 거주했다. 죽암(竹庵)은 위덕화의 신도비를 세운 10대 종손 위계문(1865~1951)의 호이다.

위덕화는 1585년 무과에 급제하고 임진왜란 때 의주로 피난 가는 선조(1567~1608 재위)를 호종했다. 위정철은 1603년 무과에 급제했으며 1631년 사신으로 심양에 다녀온 후에 『심양왕환일기(瀋陽往還日記)』라는 견문록을 남겼다.

죽암고택은 사랑채, 안채, 사당, 행랑채 등으로 이루어져 있다. 후손들에 의하면 종택은 1623년에 처음 지었고, 이듬해에 사당을 지었다. 1945년에 터를 옮겨 다시 지었으며, 건물의 배치가 일부 바뀌었지만 사당은 1624년 건축 당시의 원형을 그대로 보존하고 있다. 사당에는 위덕화의 신주를 모시고 있으며, 장례 때 신주를 모시는 영여(靈輿)라는 작은 가마도 함께 보관되어 있다.

자문의견

  1. 분야별 자문위원 1
    • 위정철은 1603년 무과에 급제했으며 1631년 사신으로 심양에 다녀온 후에 『심양왕환일기(瀋陽往還日記)』를 남겼는데 당대 명과 후금의 정세를 상세하게 기록하여 조선의 정치적 외교적 행보를 결정하기 위한 단초를 제공했다는 점에서 의의가 있다. (--> 견문록으로 보기에는 당시 복잡한 정세를 담은 중요한 일기이다.)
  2. 분야별 자문위원 2
    • 호종했다.-> 호위했다. 또는 따랐다. (쉬운 말로 수정)
    • 종택은 1623년 처음 지었고 이듬해에 사당을 지었다. -> 본채는 으로 수정
    • 죽암고택은 사랑채, 안채, 사당, 행랑채 등으로 이루어져 있다. 라는 앞의 문구와 포함관계가 어색함.
  3. 읽기쉬운문안 자문위원
    • 위정철은 1603년 무과에 급제했으며, 1631년 사신으로 심양에 다녀온 후에

2차 수정

죽암고택은 장흥위씨 판서공파 시조 위덕화(魏德和, 1551~1598)의 종택이다. 장흥위씨는 위덕화와 아들 위정철(魏廷喆, 1583~1657) 이후로 이곳 방촌마을에 대대로 거주했다. 죽암(竹庵)은 위덕화의 신도비를 세운 10대 종손 위계문(1865~1951)의 호이다.

위덕화는 1585년 무과에 급제하고 임진왜란 때 의주로 피난 가는 선조(1567~1608 재위)를 호위했다. 위정철은 1603년 무과에 급제했으며, 1631년 사신으로 심양에 다녀온 후에 『심양왕환일기(瀋陽往還日記)』를 남겼다. 이 일기는 당대 명과 후금의 정세를 상세하게 기록하여 조선의 정치적 외교적 행보를 결정하기 위한 단초를 제공했다는 점에서 의의가 있다.

죽암고택은 사랑채, 안채, 사당, 행랑채 등으로 이루어져 있다. 후손들에 의하면 종택은 1623년에 처음 지었고, 이듬해에 사당을 지었다. 1945년에 터를 옮겨 다시 지었으며, 건물의 배치가 일부 바뀌었지만 사당은 1624년 건축 당시의 원형을 그대로 보존하고 있다. 사당에는 위덕화의 신주를 모시고 있으며, 장례 때 신주를 모시는 영여(靈輿)라는 작은 가마도 함께 보관되어 있다.

문맥요소

Nodes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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참고자료